[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청년칼럼]

“선생님은 왜 차별하세요?”

예솜이의 투정에 아찔했다. 나도 어느덧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솜이도 학생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선생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것을 싫어했다. 울음을 참는 아이를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떡이 남는다면, 그것은 울음을 참은 아이 몫이어야 했다. 혹은, 규칙을 어기고서 운다면 우는 아이가 최초에 분배받았던 떡을 회수해야 했다. 규칙을 지킨 사람에게 보상하고, 규칙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융통성 없다’, ‘냉정하다’고 했다.

나는 융통성 없고 냉정한 강사였다. 매 수업을 정시에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강사들은 정시보다 5-10분 늦게 수업에 들어갔다. 늦게 오는 학생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규칙을 지킨 사람은 규칙을 어긴 사람 때문에 피해를 봐서는 안 되었다. 초등학생이 바른생활에서 배우는 형평성, ‘정의’다.

정의는 본능이다. 과제를 수행한 원숭이 A에게 오이를 주었다. 원숭이 A는 오이를 받아먹기 위해서 과제에 충실했다. 그러다 같은 과제를 수행한 옆 원숭이 B에게는 포도를 주었다. 원숭이 A도 포도를 원했다. 그러나 실험자는 계속 원숭이 B에게는 포도를 주면서 원숭이 A에게는 오이를 주었다. 원숭이 A는 괴성을 지르며 오이를 내던졌다. 학교에서의 원숭이 A는 모범생들이다. 모범생들은 오이를 내던지지도 않는다. 참는다.

Ⓒ픽사베이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는 내내 찜찜했다. 청소년의 음주 흡연이 다양성쯤으로 치부되었고, 공공장소의 그라피티가 건강한 일탈로 묘사되었다. 특히 10대의 무면허 사망사고를 주인공의 정서적 사건으로 다룰 뿐 도덕적 판단이 생략된 부분은 가관이었다. 소설을 비롯한 대중문화는 우는 10대들에게 관대했다. 사회 질서라는 억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미숙함이 가련하다고 했다. 일탈에 눈물이 버무려지며 낭만으로 포장되었다. 작가는 사회 약자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지키려고, 주인공이 사회 질서를 무시하며 외치는 ‘난 나야!’의 볼륨을 높이는 듯했다.

‘난 나야!’의 정당성을 위해 모범생들이 희생되곤 했다. ‘난 나야!’의 세계 속에서 모범생은 체제 중심에 위치한 강자였다. 마당놀이에서 양반이 희롱 당하듯, 모범생은 주체성 없이 체제에 복종하는 강아지나 고지식한 공부기계쯤으로 묘사되었다. 모범생을 끌어내릴수록 주변인의 일탈은 청춘의 자유와 낭만으로 빛났다. 대체 모범생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기에 평가절하 되어야 할까?

모범생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학교에서는 이를 사회화라고 가르친다. 사회화된 인간은 시민의 기본 소양이다. 사회화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사회 규범 간의 충돌 속에서 자신을 통제한다. 모범생이라고 해서 욕망이 없겠는가? 모범생도 늘어지게 게임하고 싶고, 무단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고 싶고, 음주 흡연의 유혹도 느낀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다. 왜냐면 그것은 사회가 합의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모범생은 규범을 지키길 ‘선택’하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나’와 ‘사회’의 균형을 잡아간다.

그러나 우는 10들은 ‘나’를 우선시 하며 사회 규범을 등한시 했다. 이들의 일탈이 유발한 소소한 피해는 쉽게 눙쳐졌다. 자기 욕망을 우선했을 뿐인데, 이들은 사회 억압에 짓눌린 피해자가 되어 대중문화의 정서적 지지를 획득했다. 눈을 감은 채 양팔을 벌리며 오토바이를 타는 정우성이 잘생겼다고 해서 일탈이 잘생긴 것은 아니다. 고집부리며 목 놓아 우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위로 받는 것을 보고 있으면, 모범생은 허탈하다. 다시 말하지만, 모범생은 참고 있을 뿐이다.

주변인들을 위로하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서열을 나누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일탈은 새로움을 창출함으로써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으므로 부적응자는 가능성의 존재들이다. 천재들의 활동은 사회 규범으로 재단할 수 없고, 어릴 때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평범한 주변인들은 모범생보다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함도 인정한다. 다만, 모범생에게도 관심을 주자는 것이다. 예솜이가 외롭지 않도록.

예솜이는 나무랄 데 없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학생’이었다. 좋은 성적은 물론이고 생활태도도 올발라 예솜이의 모든 언행은 학생으로 귀결되었다. 예솜이는 알아서 잘했기 때문에, 나는 알아서 잘하지 못하는 ‘학생 비슷한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줬다. 과제 수행이 더디거나 엉덩이가 가벼운 학생들과는 좀 더 많은 잡담을 나눴다. 예솜이는 칭찬을 많이 받았기에 잡담과 칭찬으로 관심의 분배는 공평하리라 여겼다.

착각이었다. 칭찬은 과제 수행 결과에 대한 공적 피드백이고 잡담은 사적 관심이었다. 예솜이 눈에 나는 다른 학생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을 가난까지 구매하는 부자의 욕심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예솜이도 기껏 10대였다. 10대는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의 정서적 지지가 목마르다. 정답 위를 걷더라도 그것이 맞다는 확인이 고프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토끼, 코끼리, 독수리, 트리케라톱스, 쥐며느리, 오징어 귀를 늘어놓을 든든한 대숲도 필요하다. 귀를 열고 보니 예솜이도 잡담이 길고 긴 아이였다. 필름 사진 찍는 것과 라면에 대파를 썰어 넣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였다. 위로가 필요한 아이였다.

산타 할아버지의 현명함을 벤치마킹할 때다. 울지 않는 아이에게도 선물을 줘야 한다. 선물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관심이니 못할 것도 없다. 예솜이들의 잡담을 듣다보면 보일 것이다. 예솜이도 사랑스럽다.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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