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진의 딴생각]
[청년칼럼=심규진]
‘으하하하하 히히 흐흐... 하하하하하하’
어느 날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날 쳐다보며 박장대소한다면?
우리는 그를 향해 왜 웃냐고 물어볼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대답도 없이 계속 웃는다면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낼지도 모른다. 급기야 그 사람을 향해 얼굴을 가격할지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요즘엔 침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 웃음을 잃은 자에게 상대의 웃음은 그저 비웃음일 뿐.
『영화 조커(토드 필립스 감독, 2019)』에서 주인공 아서(호아킨 피닉스 役)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웃지만 그 웃음에 화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멈출 수 없는 웃음 덕에 ‘해피’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서의 자아는 타자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썩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아서에게 화를 냈으며 그를 조롱했고 급기야 구타로 이어졌다.
결국 아서는 광대짓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두 발, 세 발. 심장을 관통하고 뇌가 작살날 때까지 방아쇠는 춤을 추었다. 그리고 방아쇠의 춤사위에 따라 아서는 몸을 흔들었고 눈을 떴을 때 조커가 탄생했다.
조커는 초록물결 머리칼을 휘날리며 주변을 서서히 피바다로 만들어갔다.
‘으하하하하 히히 흐흐... 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시대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도 있었고 그의 모습을 모방하는 이도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조커는 거리를 활보하며 세상에 독기를 뿜어내고 있겠지.
나는 조커인가,
조커를 탄생시킨 폭력적 공헌자인가,
이기심에 찌든 방관자인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삼(三) 중 택일의 문제. 불편한 선택 앞에 눈을 감고 그저 크게 웃어본다. 싸늘한 사일런스(silence).
내가 사는 사회도 웃음을 잃은지 오래인 것 같다. 어쩌면 조커가 탄생할 수도 없는 무관심의 사회일지도. 남이 웃든 비웃든 아무런 상관없이 각자의 갈 길을 가는 종착역 없는 하루. 우리 모두는 이기심에 찌든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다.
조커의 웃음이 귓가에 희미하게 스친다. 나는 더 이상 웃기 싫었다.
하늘은
퇴근 후 글을 씁니다
여전히 대학을 맴돌며 공부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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