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청년칼럼=고라니]  나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을 복수전공했는데, 아버지는 주변에 아들이 경영학과에 다닌다고 얘기하곤 했다. 사회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걸로 짐작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해도, 사회학 공부는 즐거웠다. 우리가 살며 당연시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믿음일 뿐이고, 따라서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학 거장들은 내 아이돌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최소한 양면적임을 전제하는 사고방식도 매력적이었다.

교수님 중에 무시무시한 학자가 있었다. 학문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턱턱 내는 분이었다. 난 학문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존경했다. 상아탑 안에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하는 것만이 학자들이 가야 할 '실천의 길'이라 말하는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정치와 미디어에 헌신하는 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사람은 외로운 걸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은, 엉뚱하게도 그의 패션이었다. 사회학과 건물은 캠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건물을 나오면 언덕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가운데 교수님의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킹스맨>의 콜린 퍼스도 그의 수트빨을 따라오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버튼다운 카라 셔츠 위에 진회색 니트를 받쳐 입고, 슬림핏 네이비 자켓을 걸친 꽃중년의 모습은 강렬했다. 멋스럽게 두른 머플러와 진갈색 로퍼는 화룡점정이었다.

그때 난 패션에 관하여 오욕의 역사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지는데, 군복 무늬의 오버핏 롱자켓을 군입대 전까지 입고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야간알바로 산 옷이었다. 수천 장의 통신요금 고지서를 포장하며 세기의 고민에 빠졌었다. 뭘 사야 잘 샀다고 소문이 날까.

Ⓒ픽사베이

하루 종일 중고나라를 뒤진 끝에 고른 옷이 저 자켓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성비가 좋아 보였다. 집에 굴러다니는 셔츠 아무거나 안에 입고, 자켓 지퍼를 목까지 올리면 외출 준비 끝이었다. 바지는 청바지 하나와 아버지가 입던 정장 바지를 번갈아가며 입었다. 추울 땐 안에 스웨터를 껴입고, 더워지면 소매를 걷었다. 복학생 선배들은 날 보며 묘하게 웃었지만, 난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쇼핑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교통비와 식비를 빼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여유 있는 달에는 책을 사거나 영화를 봤다. 마음의 양식에 한창 목말라 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당신을 위한 사치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 가는 것밖에 없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나를 꾸미는 데 쓰는 돈은 낭비라는 생각이 몸뚱이에 박혀 있었다.

귀찮기도 했다. 빨빨거리며 동묘 구제시장 같은 델 돌아다니면 괜찮은 옷을 값싸게 건질 수 있었지만, 옷을 사러 나갈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어떤 옷이 어울릴지 고민하는 시간은 극도의 스트레스였다. 한 벌로 모든 게 커버되는 자켓을 사고 난 뒤에야, 맘 편히 거울을 등지고 살 수 있었다. 토니 스타크에게 아이언맨 슈트가 있다면 내겐 롱자켓이 있었다.

그래서 교수님의 패션은 충격이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옷은 직업적인 신념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견지하는 개인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싼 브랜드여서가 아니다. 패션 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내가 보기에도 색의 조화라든가 핏감이 너무나 훌륭했다.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고 몸에 두른다는 게 이토록 멋진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만약 교수님이 본업은 등한시하고 정치권에나 기웃거리는 모리배였다면 휴고보스를 걸치고 있어도 싸구려로 보였을 거다. 그가 진정한 학자임을 알기에 그의 패션도 값져 보였다. 연구실 밖에선 화장실과 강의실에서만 뵐 수 있고, 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도 사회학 이슈를 논한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조차 부족한 시간을 쪼개 자신의 취향에 투자하고 있었다. 취향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밸런스의 영역이었다.

지금 난 20대 초반 시절의 사진은 거의 보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너무 못나서, 안쓰러운 마음에 사진첩을 넘겨버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나마 마음 편해지는 사진이 등장한다. 시간과 돈을 조금씩 덜어 취향을 축적한 덕이다. 어떤 색과 어떤 선들이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다가 안정적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 시대의 첨단에 서 있거나 화려한 패션은 아니다. 수수하고 평범한 축에 속한다. 그 익숙한 외피 안에서 난 즐거워 보인다.

고유한 취향을 가꾸며 얻는 만족감은 삶의 소소한 동력이 된다. 산다는 건 고단함이 8할 이상인데, 그 와중에 이 정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상당히 가성비 높은 투자 아닌가 싶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고민은 앞으로도 날 괴롭히겠지만, 군복무늬 등껍질로 다시 기어 들어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돈은 남겨 둘 거다.

너무 느슨하게 사는 것 같아 자극이 필요할 때면, 인터넷에 교수님의 이름을 검색한다. 어느 기사 속에서 교수님은 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노려본다.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쓸데없이 내가 입은 옷이나 보고 있으면 되냐, 안 되냐?" 하시는 것 같다. 그럼 이렇게 답한다. 그 덕에 군복 비슷한 걸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패션 테러리스트 생활을 청산했으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다고. 계속 공부할 열정은 없었지만 그나마 패션이라도 건졌으니 다행 아니냐고.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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