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의 하의 답장]

[청년칼럼=이하연]  잘만 썼던 물건이 갑자기 싫어질 때가 있다. 손이 안 간다거나, 보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싫다. 대표적인 예로는 헤어진 애인이 준 선물이 되겠다.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 그들은 나에게로 와 꽃만 되었겠는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서 펄쩍 뛰기도 했고,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어 간직하기도 했다. 선물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데이트를 할 때마다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늘 곁에 두다 보니 어느덧 선물은 ‘잘 쓰는 물건’이 되어있었다.

2년을 동고동락했던 분홍색 나이키 운동화는 어느 날 베란다에 처박혔다. 싫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이별.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도 어울렸던 운동화는 신발장에 전시되기는커녕 곧 버려질 쓰레기 취급을 당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에 운동화는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색이 분홍색이고, 두 번째로 좋아하는 브랜드가 나이키라서 목숨만은 살려두었다―첫 번째는 초록색과 아디다스다.

Ⓒ픽사베이

내게 가치관을 심어준 작가 중 한 명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도 푸대접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과감하게 책장 한 칸을 전부 내어줄 정도로 좋아한 작가였다. 나름의 컬렉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첫 번째 줄에서 마지막 줄로 이동됐다. 침대에 가려져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은희경 작가의 책이었다면 결코 자리를 옮기지 않았겠지만,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어서 그나마 버리지 않은 것이다.

한 달 정도 다른 손목시계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다. 나는 15년간 같은 시계를 주야장천 차는 사람으로 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내 시계를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를 대신하는 상징물이자 은근한 고집이랄까. 가볍고 세련되고 비싼 새 시계는 앤티크한 내 시계를 대신했다. 그러나 언제 팔아도 팔릴 새 시계 역시 잘 열지 않는 서랍 구석에 박혔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애정보단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였다.

길을 가다 문득 분홍색 나이키 운동화가 생각났다. 3년은 발효가 되었을 터. 찢어진 채로 발견된 운동화를 들고 동네 수선집엘 갔다. 분홍색 실 대신 금색 실을 살짝 두른 삼천 원짜리 수선 덕에 신을 수 있게 됐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들을 두 번째 줄로 끌어올렸다. 첫 번째 줄에 꽂힌 은희경 작가의 컬렉션 때문인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가면은 바뀔 수 있다’는 사상만이 떠오를 뿐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결혼식 날 새 시계를 다시 꺼내 찼다. 중요한 만남에 꽤나 유용했다. 시계는 비로소 시계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팔 생각도 없다. 예쁘니까.

치워놨던 물건들이 갑자기 수면 위로 올라올 때가 있다. 나쁜 기억의 파도가 잠잠해졌기 때문인지, 미화된 추억이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인지. 생각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물건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잘 쓰는 물건’이 되는 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 시계를 차고, 분홍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내가 이젠 낯설지 않다. 꽃 이상의 의미였던 선물들은 지금에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내게 남았다. 각자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채로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하연

얼토당토하면서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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