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대구 경북에 소재한 봉표 속 역사의 흔적

[논객칼럼=김희태]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대개 산의 초입이나 등산로에서 봉표나 금표 등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막연히 봉표(封標)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봉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우선 봉표는 왕릉의 조성 후보지에 표석을 세워 묘를 쓰는 것을 금했던 기능을 했다. 이는 <수원부지령등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당 기록을 보면 현륭원(顯隆園, 현 융릉) 천봉이 이루어지기 전 화산 일대에 봉표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89년 7월 15일 봉표처 내에 이관진과 그의 부인 무덤이 있어 묘를 강제 이장하도록 조치했음을 보여준다.

문경 황장산 봉산 표석,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봉산으로 지정했음을 보여준다@김희태

또 다른 봉표의 의미는 봉산과 관련되어 있다. 조정에서 봉산으로 지정한 곳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경계에 세운 표석을 의미한다. 나무를 보호했던 이유는 바로 나무의 쓰임새로 구분이 가능한데, 크게 ▶황장봉산(黃腸封山) ▶율목봉산(栗木封山) ▶향탄봉산(栗木封山) 등으로 구분된다. 현재 우리가 금강송으로 부르고 있는 황장목의 경우 궁궐이나 재궁(梓宮, 왕실의 관)을 만드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장목이 생산되는 지역의 경우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지정, 입구에 봉표를 세워 이를 보호했다. 문경과 울진, 원주와 인제, 화천 등에 황장봉산과 관련한 표석이 남아 있다. 또한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서도 봉산에 대해 잘 살필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봉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문경 김룡사 금계비,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김룡사가 향탄봉산사패금계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준다@김희태

밤나무의 경우 지금도 종묘에서 볼 수 있는 신주(神主)와 신주를 보관하는 궤를 만드는 목적으로 사용되었기에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된 경우다. 또한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숯과 향의 재료로 쓰이는 향탄목을 보호하기 위해 향탄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하는 등 쓰임새에 따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봉표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봉표 가운데 대구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효명세자와 관련한 봉표가 다수 확인이 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해당 봉표는 ▶의성 점곡리 연경묘 봉표 ▶경주 불령봉표 ▶경주 시령봉표 ▶경주 수렴봉표 ▶대구 수릉봉산계 표석(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 ▶대구 수릉향탄금계 표석(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등이다. 그렇다면 해당 봉표에는 어떠한 역사의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일까?

■ 봉표가 알려주는 이름, 효명세자

해당 봉표에 연경묘(延慶墓)와 수릉(綏陵)이 등장하는데, 연경묘는 효명세자가 요절한 뒤 붙여진 묘의 이름이며, 수릉은 훗날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로 추존이 되면서 받은 능호다. 따라서 연경묘와 수릉 모두 공통적으로 효명세자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1809~1830, 추존 익종, 문조)는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효명세자의 세자빈은 훗날 조대비가 되는 신정왕후 조씨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헌종(재위 1834~1849)이다. 역사를 통틀어 효명세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로, 일부에서 “만약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이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수릉(綏陵), 효명세자(=추존 익종,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으로, 경기도 구리에 소재한 동구릉 가운데 하나다@김희태

효명세자는 왕비 소생의 적장자라는 정통성과 함께 현군의 자질을 보였다. 때문에 순조 역시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데, 순조의 재위 당시 김조순을 필두로 안동 김씨의 세력이 커지던 상황이었고, 홍경래의 난으로 대표되는 사회 구조의 모순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효명세자의 등장은 순조에게 있어 미래를 상징하는 희망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예술적인 부분에서 이전부터 있었던 궁중무용인 정재(呈才)를 더 보완하고 수정하는 등 나름의 예술적인 감각도 갖고 있었다. 효명세자는 이러한 궁중무용을 활용한 연회를 크게 열며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정사에 있어 신상필벌을 명확히 하며 신하들을 휘어잡는 등 순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포천시 영중면 성동1리에 자리한 태봉 석조물, 효명세자의 태실 석물로, 태실가봉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김희태

하지만 효명세자는 1830년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불과 22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그야말로 순조에게 있어 효명세자의 죽음은 날벼락과 같은 것으로, 직접 쓴 제문을 읽어보면 애통함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실제 효명세자 사후 장인인 김조순 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견제장치가 없이 폭주하게 되고, 여기에 삼정의 문란과 농민봉기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효명세자의 무덤은 의릉(懿陵,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능)의 좌측에 있었는데, 최초 연경묘(延慶墓)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1835년 익종으로 추존되고, 자연스럽게 수릉(綏陵)의 능호를 받게 된다. 이후 수릉은 현 위치인 동구릉 내로 옮겨지게 되고, 1890년 신정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하는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이 됐다.

■ 효명세자의 흔적을 간직한 봉표, 경주에 소재한 연경묘 봉표

이러한 효명세자의 흔적을 보여주는 봉표가 대구 경북에서 6곳(대구 2곳, 의성 1곳, 경주 3곳)이 확인되고 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향탄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연경묘(=수릉)에 쓸 숯과 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봉표가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 경주에서는 세 곳의 봉표가 확인되고 있다. 경주 불령봉표(佛領封標),경주 시령봉표(枾嶺封標),경주 수렴봉표(水念封標) 등이 그것이다.

경주 불령봉표, 신문왕 호국행차길에 위치하고 있다@김희태
 숯가마 터, 인자암에서 불령봉표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김희태

우선 불령봉표는 기림사나 황용약수터(=인자암) 방향으로, 신문왕 호국행차길에 자리하고 있다. 기림사 쪽에서 출발할 경우 용연폭포를 지나 900m 지점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용약수터(=인자암, 경주시 황용동 14-2)에서 출발할 경우 대략 3km 가량 산행을 하면 불령봉표에 도착하게 된다. 불령봉표는 자연 바위에 ‘연경묘향탄산인계하불령봉표(延慶墓香炭山因啓下佛嶺封標)’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연경묘는 효명세자의 무덤 명칭으로, 연경묘의 제사에 쓸 숯과 향을 만드는 향탄목이 있는 곳이기에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령봉표의 명문은 육안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한편 인자암에서 출발할 경우 불령봉표와 함께 숯가마 터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시령봉표, 내용은 불령봉표와 동일하나 보조 글에 비석을 세운 연도와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김희태

시령봉표의 경우 경주시 양북면 용동리 산 700번지에 주차한 뒤 감재골을 따라 40분가량 도보로 이동하면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이정표와 함께 시령봉표를 볼 수 있다. 해당 고개는 과거 감포에서 장기로 넘어가는 길로, 바위에 새겨진 내용 자체는 불령봉표와 동일하지만, 보조 글에 봉표를 새긴 날짜와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시령봉표에는 ‘연경묘향탄산인계하시령봉표(延慶墓香炭山因啓下枾嶺封標)’가 새겨져 있다. 앞선 불령봉표와 동일한 내용으로, 보조 글을 통해 비석을 세운 연도를 알 수 있다. 해당 명문 중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은 신묘 10월이다. 연경묘의 경우 훗날 수릉으로의 능호 변천이 있었다는 점에서 연경묘 시기의 신묘 10월은 1831년(=순조 31년) 10월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봉표와 관련해 묘감 김창호, 감동 이명희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경주 수렴봉표, 시령봉표와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김희태

​마지막으로 수렴봉표의 경우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154-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수렴리의 지명은 과거 수영포가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앞선 두 곳의 봉표와 달리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나 찾는 과정이 비교적 수월한 편으로, 리멤버 펜션 이정표 아래쪽 바위에 수렴봉표가 새겨져 있다. 수렴봉표의 주 명문은 ‘연경묘향탄??계하수렴봉표(延慶墓香炭??啓下水念封標)’가 새겨져 있어 앞선 봉표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조 글을 통해 봉표를 세운 날짜가 시령봉표와 동일한 신묘 10월로 확인된다. 한편 봉표와 관련해 묘감 김창호와 감동 이명희가 등장하는데, 해당 인물의 경우 시령봉표에서도 등장한바 있다. 여기에 수렴봉표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추가로 확인되는데, 김하용, 이(吏: 관리를 의미) 박동윤, 풍헌 하학로 등이다.

나정 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한 선정비와 불망비, 봉표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어 함께 주목해보면 좋다@김희태

이와 함께 경주 나정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선정비와 불망비를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부윤이상공능섭거막선정비(府尹李相公能燮祛瘼善政碑)’와 ‘부윤김상공철희영세불망비(府尹金相公哲熙永世不忘碑)’다. 해당 선정비와 불망비는 봉표와 관련이 있는데, 비문을 통해 토함산과 동해안 주변으로 연경묘의 숯과 향을 공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정비와 불망비가 세워진 배경은 향탄목을 공급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잡역이 부과되는 것에 대한 반발과 이를 시정했던 경주부윤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는 것이다.

■ 의성과 대구에 소재한 봉표,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문화재

경주에 있는 세 곳의 봉표처럼 의성군 점곡면 명고리 산 36번지에서도 연경묘 봉표가 확인되는데, 크게 주 명문과 보조 글로 구분된다. 우선 바위에 새겨진 주 명문은 ‘연경묘향탄산인계하성산옥곡암봉표(延慶墓香炭山因啓下城山玉谷巖封標)’가 새겨져 있다 .경주의 봉표 내용과 큰 차이는 없다. 즉 성산 옥곡암이 연경묘의 제사에 쓸 향탄목을 공급하는 곳이기에 나무의 벌채를 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해당 봉표의 경우 관리부재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주 명문의 일부와 좌측에 봉표를 새긴 연도 표기 부분의 훼손이 가속화 되어 육안 판독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행히 해당 명문의 경우 이미 조사가 진행되어 갑오칠월일봉심(甲午七月日奉審)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경묘에서 수릉으로 능호가 바뀐 것을 고려해보면 갑오 7월은 1834년(=순조 34년) 7월이다.

 의성 연경묘 봉표, 관리 부재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김희태
성산 옥곡암의 원경, 봉표를 통해 성산 옥곡암 일대가 향탄목을 공급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김희태

한편 대구 팔공산에도 수릉(綏陵)과 관련한 표석이 있는데, 바로 수릉봉산계 표석과 수릉향탄금계 표석이다. 수릉봉산계 표석은 팔공산의 등산로 중 수태골에서 서봉으로 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으며, 바위에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수릉은 효명세자의 능호로, 본래 연경묘로 불리다가 헌종에 의해 왕으로 추존된 뒤 수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봉산계(封山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팔공산은 어떤 목적의 봉산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팔공산 분수대 광장에 자리한 또 하나의 봉표인 수릉향탄금계 표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릉향탄금계 표석은 대구시 동구 용수동 27-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향탄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숯과 향의 재료로 쓰였다. 즉 해당 봉표는 수릉의 제사에 쓸 숯과 향을 공급하기 위해 향탄봉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과 이 때문에 나무의 벌채가 금지되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대구 수릉봉산계 표석, 바위에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가 새겨져 있다@김희태
대구 수릉향탄금계 표석, 해당 표석을 통해 팔공산 일대가 수릉의 향탄목을 공급하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김희태

또한 팔공산이 봉산으로 지정된 뒤 이를 관리하는 사찰이 동화사였는데, 이는 표석 아래 있는 첩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첩지의 내용을 보면 ▶예조에서 봉산을 관리할 사찰로 동화사로 지정 ▶석민헌을 수릉의 제사에 숯과 향을 공급할 향탄봉산수호총습과 도승통자로 임명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구 경북에 소재한 봉표를 통해 효명세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다만 소개된 6곳의 봉표 가운데 대구 수릉봉산계 표석과 수릉향탄금계 표석만 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뿐, 의성과 경주의 봉표는 아직까지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실제 의성 연경묘 봉표처럼 훼손되고 있는 사례도 있기에, 해당 봉표들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비롯해 보호 대책과 관심이 요구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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