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세상읽기]

[논객칼럼=이계홍]

70년 체제를 반추하며 미국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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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은 미국과 일본에게 근본적 책임이 있다. 소련과 북한의 책임은 그 후의 일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잘 모르거나 외면해왔다. 70년 체제를 유지해온 구 권력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이런 사실을 숨겼다. 일부 학자들이 그게 아니라고 했지만 구 권력은 이를 덮었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일면의 진실만 일방적으로 통용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고 세계관을 인식하는 것이 대세로 흘러갔다. 미국과 일본을 추종해야만이 출세하고, 권력의 중심부로 이동해간 세월이 자그마치 한 세기가 되어가고 있으니 자연 사람들은 거기에 순치되었다. 60대 이후 나이 든 이는 지금도 그런 세계관과 역사관 속에 매몰되어 있고, 기득권을 형성한 그들의 밑에서 혜택받아온 2세, 3세들도 거기에 물이 들거나 세뇌되었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 강도는 더하다. 필자 역시 한동안은 그것이 옳은 길인 줄 알았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발언하는 데 당연히 옳은 일로 받아들였다. 사회적 주류를 형성한 그들의 블록에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사대주의에 젖은 지식인일수록 그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가치보다 이익이 전제된 사대적 사고라는 것을 안 것은 정말 철이 든 한참 뒤의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학계에서조차 활발히 논의된 해방의 모순을 아는 데는 그만큼 지체되었다.

성장기를 통해 미국은 은혜로운 나라고, 공산세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으며, 나라가 궁핍했을 때 도와준 혈맹이 미국이라는 사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근래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이 많다. 미국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굳건한 우방이라고 해도 선한 나라는 없다. 때로는 독선과 오만으로 군림하고, 불평등을 강제할 수 있다. 불행히도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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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다(1945.9.8.).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의 38선 이남에 들어와 “승전군(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의 포고령대로 조선의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9월8일 미군기와 전투기의 엄호 아래 4만 5000명의 군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 ‘미 점령군’은 일제 경찰과 함께 우리 국민을 탄압하는 것으로부터 첫 임무를 시작했다. 해방군을 환영하러 나간 인천시민을 폴리스라인을 넘었다고 발포해 2명이 총맞아 숨졌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 태평양지구사령관 맥아더가 일제 헌병과 경찰에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기구를 존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결과 나온 첫 희생이었다.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총독부에 일본군과 경찰력을 동원해 치안권을 그대로 이행하라고 명했다.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일제는 계속되었다.

이에앞서 조선총독부는 8.15 패망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여운형에게 모든 행정권을 이양하고 일본인이 다치지 않게 무사히 귀국하도록 허여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행정 이행절차가 진행되고, 건준의 청년대가 주요 행정기관, 방송국, 금융기관 경비에 나섰다. 건준은 전국에 지부를 설치했으나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곧바로 행정조직 인민위원회로 전환했다. 전국은 지방 유지들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미군이 상륙하면서 일본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미 태평양사령부가 조선총독부더러 치안권을 계속 행사하라고 명하고, 총독정치를 이어가도록 용인하자 재빨리 눈치 챈 일본이 건준-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기존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을 그대로 존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료와 군인, 경찰들을 고스란히 행정 조직에 투입시켰다. 그러면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물러갔다. 미군이 해방 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해방의 모순은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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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련군은 미군보다 한달여 먼저 38선에 들어왔다(1945,8,9). 소련이 북한땅에 들어온 것은 미국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미국은 만주 관동군의 위력에 놀란 나머지 소련 참전을 간절히 요망했다. 미국이 제대로 정보만 갖고 있었다면 소련군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것도 어느 면에선 우리의 비극이다.

미국이 소련을 대일전에 참가하도록 간절히 요청했던 것은 만주 관동군이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실제로 만주 관동군은 100만 대군의 잘 훈련된 병력이었다. 엄하고 절도있고, 충성스러운 관동군은 일본 황실에서도 혹 역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을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단독 전쟁이었다. 미국은 여러모로 외로운 처지였다. 진주만(하와이)을 기습 당한 뒤 미국은 본토 공략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든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이려고 외교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관동군이 최강의 군대라는 것은 일본의 작가 고미가와 준페이의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에 그대로 나온다. 준페이는 1940년 만주 광산 노무관리로 일하던 중 소집 영장을 받고 관동군 보병으로 소만국경에 배치된다. 이 경험을 살려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을 발표했는데, 이때의 관동군은 천하무적에 거칠 것없는 잔혹한 강군이었다.

‘인간의 조건’은 시베리아 추위보다 더 매서운 기합에 시달리며 생과 사를 넘나드는 주인공 가지가 겪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전쟁상황을 그린 일종의 반전소설이다.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위선과 비겁함, 잔인함, 포악성, 이기심, 나약함, 무가치함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중국인, 몽골인 종군위안부 얘기도 적지 않게 나온다. 모든 인간 군상이 전쟁의 도구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군대는 어느새 강제된 강군으로서 무자비하고 비인간적 괴물이 되어있었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이런 관동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소련더러 참전해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국은 일본 본토까지 치고 올라가는 데는 진격로가 너무 멀었다. 미국은 공군력을 바탕으로 괌, 오키나와 남단까지 진격했으나 한반도 북방 만주까지는 30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소련은 불과 200km 내에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 만주는 진공상태였다. 만주 관동군은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자 군사력의 대부분을 남태평양과 인도지나 반도, 중국 남부에 투입했다. 만주는 항일 빨치산을 미행, 감시, 투옥하는 간도특설대와 첩보대 등 비전투 요원만 운영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여전히 막강 군대가 포진하고 있다고 믿고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다. 그것이 한반도 운명을 가른 변곡점이 되었다.

소련은 첩보부대를 통해 관동군의 주력이 남태평양으로 이동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베리아 벌판을 떠돌던 불량배들까지 동원, 군대를 긴급 편성해 소만국경에 투입했다. 이때 소련은 막강군대라는 일본군이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절도있고 용감한 일본군이 도망치기 바빴던 것이다.

스탈린은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재빨리 파기하고,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벌판을 휩쓴 뒤 1945년 8월 9일 함경북도 나진, 선봉, 웅기로 들어와 38선까지 내려왔다. 소련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38선에 머문 것은 미국이 38선에서 양국 군대가 만나 승전의 축제를 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38선에서 승리의 미주에 흠뻑 취했다.

소련은 부산까지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같은 연합국인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38선에 머문 것이다. 만약에 소련이 약속을 어기고 부산까지 내려왔다면? 우리는 공산화되었을지 모른다. 정말 큰 일 날뻔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지정학적 중요성도, 한반도에 사는 민족도 잘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로서 미국에 대항하는 또다른 일본으로 아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방 이후 일본인과 똑같은 국민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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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 태평양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으면서 일본의 ‘천황제’를 인정했다. 일본 정체성의 뿌리인 천황제를 인정하니 전후 처리는 유야무야되었다. 히틀러의 자살, 무솔리니의 처형과 달리 일본 왕은 거뜬히 생명을 부지하게 된 것이다. 전쟁 책임이 없어진 것이다.

이들 두고 사람들은 자유진영의 방어선을 치기 위해 미국이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적국 일본을 승리하자마자 우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소련과 함께 일본을 쳤는데, 승전하자마자 일본을 우방으로 대우한다? 최소한 1947년 7월 이전까지는 미국과 소련은 우방이었고, 일본은 적이었다.

일본이 일왕의 처형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일화들은 눈물겨울 정도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일본 국민성은 미국에 사정없이 꼬리를 내리고, 게이샤를 동원한 침대 정치에서부터 정치인, 외교관, 군수산업가, 자본가들이 총동원되어 외교전을 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은 4년이지만 이마를 맞대고 선린국으로 우정을 맺은 기간은 150년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을 할 때는 중국과 함께 일본의 인력이 많이 들어왔다. 이들이 전후 일본계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미국 군대도 일본계가 많았다. 영어와 일본어를 아는 일본계 장교만도 수만 명이었다(반면 한국은 선교사 출신 기십명에 불과). 맥아더의 참모 중 일부도 일본계였고, 트루먼의 이웃도 일본인이었다. 특히 트루먼은 일본인과 함께 대학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유럽 대륙의 전쟁과 판이하게 달랐다. 피를 부르는 보병전 대신 피해 상황을 제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중전과 해상전 중심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프랑스군이 보병전을 벌이며 처절하게 피흘리며 죽고 죽이는 증오와 저주의 참혹상을 상대적으로 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비극은 여기서 잉태된다.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나라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이 승전국 미국의 관용으로 어물쩍 넘어가버린 것이다. 나치군은 하급 장교까지 잡아 재판에 넘기고, 독일군 포로들도 가차없이 척결해버린 유럽 국가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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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미소 대결 때문에 일본을 자유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일간의 동맹체제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해방 초기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다. 연합국의 2차대전 승리 이후에도 한동안 미소간은 최대 우호국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스탈린과의 개인적 친분도 있었지만, 공동의 적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함께 부순 우군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조는 트루만 대통령 집권 초반기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영국의 처칠 수상이 소련의 패권정치를 우려하면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소 냉전의 신호탄이 울렸다. 처칠은 1947년 5월 미국 미주리 주의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철의 장막'을 거론했다.

“철의 장막 뒤에는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옛 나라의 수도가 놓여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이 유명한 도시와 이곳의 주민들이 이른바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권에 있으며,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뿐만 아니라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통제에 묶여 있다”

이 연설은 ‘평화의 핏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지만, 어느 순간 대결적인 ‘철의 장막'으로 둔갑했다. 처칠의 이 연설은 전쟁이 없는 평화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질서를 냉전구도로 몰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사실 이 말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철의 장막'을 언급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처칠 발언 이후 한 세기가 다 되는 동안 세계는 냉전(cold war) 구도 속에 군비경쟁을 가속화했다. 그중 분단국인 우리가 전쟁까지 치르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 분단 고착화는 미국과 소련의 산물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영향이 더 크다. 일본을 패전국이 아니라 일본이 말하는 이른바 ‘종전국’으로 인정한 미국의 태도 때문에 질곡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아시아 국가의 고통을 조금만 이해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 가설은 의미가 없다지만 미국의 오판과 오만, 그리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세력들의 행패로 우리 역사는 상처 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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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일본 지배를 받는 동안 한국에는 독특한 생존의 존립근거가 마련되었으니 그것은 친일파의 삶이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지은 죄가 있어서 한동안 숨죽이며 살았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인적/물적 자원을 그대로 물려받아 공과를 따지지 않고 100% 재배분함으로써 역사가 변질되었다.

역사의 순명을 거역한 데 따라 가치관이 오도되었다. 미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이 배제되거나 범인시되니 역사가 거꾸로 서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자가 있었지만 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는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도구로 차용했을 뿐, 진실을 보면 대개는 민족주의였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 때문이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유순한 사회주의자였으며, 지식인의 기호품으로 달고 다니는 일종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든지 상호 적응할 수 있었고, 교화가 가능한 세력이었다. 그런 그들을 적대시하면서 척결 대상으로 삼자 그들 역시 반동적으로 나왔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는 공포의 경찰국가로 70년 체제를 유지했다.

그런 냉전의 우산 밑에서 일본-미국에 빌붙은 세력이 사회의 주류가 되고, 독재의 기둥이 되고, 그리고 오늘날 견고한 기득권층이 되었다. 나라의 근본과는 상관없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의 가치관이 대세가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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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해리 해리스 주한미대사가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개별 관광 추진에 대해 “(한국인이)여행갈 때 (북한에)들고 가는 것 중 일부는 제재에 걸릴 수 있다”며 “추후 제재가 촉발(trigger sanction)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분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적대적으로 해결될 일이 무엇인가. 70년 적대의 결과가 무엇인가. 여전히 대결적이고 분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벌써 세계의 냉전은 허물어지지 않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교착상태에 빠져있는)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않고 남북협력을 증진시켜 북미 대화를 촉진해나갈 필요성이 커졌다고 생각한다"면서 접경지역 협력, 개별관광, 도쿄올림픽 공동입장·단일팀 구성 등을 추진하겠다고 언명한 것은, 지지부진한 북미 관계를 제3의 방식으로 해결해보려는 노력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서로 윈윈하자는 방법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국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해리스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딴지를 건다? 그러니 사사건건 방해만 하는 일본인 2세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미국 대사이지, 일본인 2세가 아니다. 남북 교류를 막고, 제재를 염두에 둔 발언을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이는 진정한 우방이 할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분단의 책임이 있는 미국이 할 말이 아니다.

우리가 현대사를 좀더 알아야 하는 이유는 많다. 그중 미국을 제대로 알자.

이계홍

현 세종포스트 주필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여론독자부 차장

서울신문 수석편집부국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용인대 겸임교수,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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