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정의 글우물]

[청년칼럼=허서정] 영화를 고르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가?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내 십대는 줄곧 <해리포터> 시리즈와 함께였다. 원작을 읽고 홀딱 반해 영화가 개봉하는 날만 기다렸고 모든 작품을 극장에서 관람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평론가 한줄 평과 관람객 별점, 예고편을 참고해 어떤 걸 볼지 결정했다. 그런데 슬슬 외부 기준을 신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겨났다. 짜릿한 예고편에 설레며 관람하러 갔더니 예고편이 전부였다든가, 두 시간 가까이 인내심을 시험했지만,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도저히 모르겠는 거다.

그 다음부터는 기준을 좀 바꿨다. ‘흥행 보증수표 OOO’, ‘메가 히트 감독의 복귀작’ 같은 광고나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극찬은 뒤로 밀려났다. 줄거리와 분위기, 그리고 이 영화가 뭘 말하려고 하는가? 대략 세 가지만 내 마음에 들면 합격이었다. 그렇게 2018년 2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만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 전반을 지배하던 청록빛 색감이 잊히지 않았다. 집에 와서 해당 작품을 폭풍 검색했다. 주제의식, 상식적 경계를 뛰어넘은 사랑의 방식과 더불어 ‘다양성 영화’라는 말을 알게 됐다.

마이너 혹은 메이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낯설고 괴상해 보이는 이야기, 비주류가 주인공인 이야기, 어딘가 불편한 부분을 생각하게 만드는 머리 아픈 이야기들은 일반 극장에서의 개봉 가능성부터 불투명했다. 조금 다른 길을 걷는 작품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개봉하기 몇 달 전부터 입소문 파다한 블록버스터와 상업 영화들은 보겠다는 사람이 차고 넘쳤으니까. 대규모 영화 카페에 가입했다. 주차별 상영예정작과 먼저 개봉한 해외에서의 평가 등 ‘덕후’들의 알짜배기 정보가 많았다.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각각 관람한 두 작품이 현재 내 인생영화다.

나이 아흔 살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이미 32년 전, 소년들의 첫사랑을 그려낸 적 있었다. 소설가 E.M. Forster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국 영화 <모리스>다. 휴 그랜트와 제임스 윌비 주연으로 1987년에 최초 개봉한 이 작품은 당시 제 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동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3관왕을 달성했다. 또한 작가의 자전 소설이기도 하다. 포스터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휴 메러디스를 만나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휴는 여성과 결혼했다. 포스터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영화 <모리스>의 이야기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시작한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삼위일체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주인공 ‘모리스 홀(제임스 윌비)’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우연한 기회로 ‘클라이브 더럼(휴 그랜트)’을 만난다. 1909년 케임브리지 가을 학기부터 1913년까지 약 5년 동안, 영화는 두 남자의 사랑과 상처와 성장을 긴 호흡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극적인 해피엔딩을 맞는 정통 로맨스의 흐름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둘의 사랑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조망한다. 거기에는 종교와 관념, 관습과 계급갈등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 이하 내용은 영화 일부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함) 두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해 교차했다가 결국 각자의 길을 간다. 기독교 집안의 무신론자 클라이브는 모리스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가족과 교리에 충실하던 모리스는 클라이브를 향한 감정을 깨닫고 대학을 자퇴한다. 배경에는 번역 수업에서 남성 간의 동성애를 두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악덕 행위’라고 말하는 콘월리스 처장이 있었다. 더는 대학에서 만날 수 없게 된 둘은 서로의 집안을 왕래하며 교류를 이어간다. 여기에는 가족을 비롯한 타인의 시선이 있다. 어느 날 케임브리지 동문이었던 리슬리 경의 추문이 신문을 장식한다. 죄목은 남색이었다. 1967년까지 동성애는 즉시 체포되어 수감될 수 있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리슬리는 한순간에 정치 경력,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이로부터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본 클라이브는 모리스와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을 눈치 챈 듯한 집사 심콕스의 시선도 만만찮은 압박이다. 그는 여성과의 결혼, 변호사 시험 합격, 국회의원 선거 준비를 거치며 종내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남성상에 순응한다. 모리스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갈등하다 상처를 극복하고 사냥터지기 알렉과 계급을 넘어선 진정한 사랑을 나눈다.

Ⓒ네이버 영화스틸컷

올해 1월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퀴어와 페미니즘을 모두 다뤘다. 칸영화제에서 <기생충>과 더불어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거론된 끝에 각본상을 수상했다. 감독이자 각본가인 셀린 시아마 역시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모리스>의 포스터와 맥을 같이 하지만, 이 작품은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을 살려 두 여주인공의 관계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점이 다르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수녀원에 머물던 엘로이즈는 친언니가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자 다시 그 운명을 이어 결혼할 위기에 놓인다. 18세기 프랑스의 여성들에겐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완성된 초상화를 상대 남성에게 보내 승낙을 얻으면 결혼이 진행되기에 엘로이즈는 포즈 취하기를 거부해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꾀를 내어 딸에게 마리안느를 산책 친구로 소개하고, 마리안느에게는 딸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라고 지시한다.

둘의 관계가 무르익는 지점은 엘로이즈의 대사 한 줄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비밀리에 엘로이즈를 관찰하며 머릿속에 옮긴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던 마리안느는 마침내 초상화를 완성한다. 초상화 주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린 그림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둘 중 누구도 닮지 않았다. 실망과 분노로 마리안느를 돌려보내려는 어머니를 엘로이즈가 저지한다. 포즈를 취하기로 마음먹은 딸과 초상화 화가에게 자유로운 5일의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백미 중 하나는 귀족인 엘로이즈와 평민인 마리안느 사이에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를 어우러지게 했다는 점이다. 평민이기에 결혼에 대한 의무가 없는 마리안느와 달리 엘로이즈는 정략결혼의 서사를, 소피는 원치 않는 임신과 그로 인한 낙태의 서사를 갖는다. <모리스>에서 알렉은 계급을 극복하지 못하나 이 작품에서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소피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고 아픔의 과정을 함께 나눔으로써 서로 동등한 관계를 정립해 낸다.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여성들의 연대이면서, 정형화된 틀로 대변되는 억압을 주체성으로 극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대표 주제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상징성을 가지고 변주된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완벽한 미장센을 구사하는 데다 배우들의 눈빛, 손짓,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경음악을 최소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사랑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진심으로 서로를 응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5일이든, 클라이브와 모리스의 5년이든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포스터가 <모리스>를 집필하고 나서 “내가 죽거나 영국이 죽기 전에는 출간할 수 없다”고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21세기의 인식으로도 남성 간 또는 여성 간의 사랑을 ‘사람이면 모두 갖는 보편적 정서’라고 얘기하긴 어렵다. 동성애가 비정상이라서가 아니다. 이러한 일반화는 약자와 성소수자, 퀴어와 페미니즘이라는 맥락을 배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인간의 보편 정서이나 사랑의 유형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폭력과 다름없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말하듯 그 형태는 물과 같이 자유롭고, 또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한다.

다양성 영화는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크린 싸움에서 밀린다. 영화시장은 날로 확대되고 한국영화도 질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원하는 영화를 볼 자유에 대한 권리 보장은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3년에는 <아이언맨 3>와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전체 스크린의 70% 가량을 독식하며 다양성 영화가 설 자리를 빼앗았다는 비판을 들었다. 2019년에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전국 2,760개의 스크린을 점유하며 자그마치 스크린점유율 57.1%를 기록했다고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왜 변화하지 않는가.

영화콘텐츠‘산업’이기에 시장논리에 따라 다수가 원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대형 배급사와 영화관 체인의 영리추구가 지나치게 우선될 때 일반 관객들은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점이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퀴어와 페미니즘을 말하는 독립영화, 예술영화는 말 그대로 비주류 중의 비주류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취향을 존중한다. 그러니 근거 없는 편견에 사로잡히기보다 직접 보고 판단하자.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날이 오기까지 모든 소수와 다양성을 응원한다.

허서정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고자 펜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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