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Antonio Skármeta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El Cartero de Neruda>

[논객칼럼=김호경]

불타는 인내심으로 사랑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포도이다. 언제부터 칠레 포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커다랗고 파란 칠레 포도는 마트마다 쌓여 있고, 값도 그다지 비싸지 않으며, 맛도 그럭저럭 좋다.

두 번째는 길고 긴 영토이다. 태평양을 왼쪽에 두고 있는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가늘면서도 가장 길다. 남북의 길이는 무려 4,300km로 한반도의 4배가 넘는다.

세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라는 시인이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김호경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199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감독 마이클 래드포드)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은 시인 네루다와 어부의 아들 마리오, 그의 연인 베아트리스 곤잘레스이다. 주인공이 네루다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원작은 <불타는 인내>(Ardiente Paciencia)이며 작가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이다. ‘불타는 인내(忍耐)’는 네루다가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밝힌 수상소감에 등장한다,고 하는데 원래는 랭보(Jean-Arthur Rimbaud)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장식하는 시 구절이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Et a l'aurore, armes d'une ardiente patience, nous entrerons aux splendides villes.

스카르메타는 <불타는 인내>가 <일 포스티노>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완성된 후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제목을 바꾸었고, 곧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간행되어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루다가 훌륭한 시인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일 포스티노>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루다는 왜 불타는 인내를 인용했을까? 인내심이 불에 타오른다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찬란한 도시는 어디이며, 입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알 수 없다’이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어쩌면 기자) 물었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꼽으라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낡을 대로 낡은... ‘사랑’이라는 단어. 그 단어는 쓰면 쓸수록 더 강해지지요.”

그래서... 불타는 인내는 결국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단 한 명을 위해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네루다의 시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인데 이 시는 무려 1924년에 발표되었다. 마지막 ‘절망의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새벽 부두처럼 버려졌다 / 떠는 그림자만이 내 손 속에서 몸부림친다 / 오, 그 무엇보다도 먼, 오, 그 무엇보다도 먼 /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오, 버려진 자!”

17살 마리오 역시 이 시를 읽었을 것이다.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검은 섬)라는 코딱지만한 어촌의 옆 동네에 사는 마리오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렇듯 매일 빈둥거리다가 어느 날 아버지 호세 히메네스에게 따끔한 잔소리를 듣는다.

“일자리를 구해.”

다행히 마리오에게는 레냐노(우리나라로 치면 삼천리호) 자전거가 있었고, 더 다행히도 산안토니오 우체국에서 직원을 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 우체국장 코스모는 선선히 채용하지만 조건을 말한다.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어촌 사람들은 대부분 까막눈이었다). 즉 그다지 재미없는 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수신인이 파블로 네루다이며, 때는 1969년 6월이었다.

난생 처음 근로의욕을 느낀 마리오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네루다를 찾아가 우편물을 전해준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리는 광경은 영화의 명 장면 중의 하나이다. 마리오는 그 일이 좋기도 하지만 네루다의 시집 <일상송가>에 사인을 받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시인의 멋진 헌사(獻辭)를 기대하면서 변변찮은 급여를 털어 두 번째 시집 <新 일상송가>를 샀건만 네루다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모두 무엇인가의 메타포(metaphor)’라는 엄청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친절하게 시를 들려준다.

“나는 바다이고... 푸른 표범 일곱 마리, 푸른 개 일곱 마리... 바위섬을 훑고...”

파도를 ‘푸른 표범’과 ‘푸른 개’로 은유한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세계적 시인에게서 명 강의를 들었으니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잠시 후, 포구 선술집에서 만난 소녀 베아트리스에 비하면 네루다의 메타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김호경

사랑도, 메타포도 기실은 일상적인 일일까?

베아트리스는 16살이다(한창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 아닌가?). 엄마와 함께 주점을 운영한다. 엄마는 세상물정에 밝다. 딸을 구제하기 위해 남자의 번드르르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진심으로 일러준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진리 중의 진리이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소년소녀를 제정신 차리게 만들 수는 없다. 급기야 네루다까지 나서 소년소녀를 응원하고, 둘은 결혼한다. 두 사람은 피 끓는 청춘 덕분에 넉 달 동안 열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어느 날, 격정적인 섹스가 끝났을 때 엄마는 잔소리를 퍼붓고, 아름다운 베아트리스는 개처럼 짖어댔다.

“일거리를 찾아.”

행복 끝, 고생 시작이다. 세상도 덩달아 변하기 시작했다. 칠레 민주화운동의 결과가 열매를 맺는가 싶었지만 우울한 상황이 거듭된다.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는 1970년 9월 대통령선거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고 대통령이 되었다. 네루다는 아옌데에 의해 파리 대사로 임명되고, 드디어 노벨문학상도 받는다. 그러나 3년 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Ugarte)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다. 네루다는 이제 집권세력의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다. 피노체트가 그를 제거(혹은 추방)하지 못한 이유는 세계적인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1973년 9월 23일 산타마리아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12일 후다. 네루다의 집은 전부 약탈당했다.

우리의 마리오는 네루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5시 즈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름과 직업, 생년월일을 묻는다. 우체부 마리오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 태운다. “무슨 일이죠?”라고 묻는 마리오에게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렇다. 어떠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놀라움과 기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다. 마리오가 네루다를 흠모한 것, 베아트리스를 사랑한 것은 삶의 깊은 깨달음이고 경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미친 짓, 일상적인 일이다.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메타포를 배워 진실한 시인이 된 마리오는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내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그 후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더 알아두기

1. 남미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본명은 루실라 고도이 데 알카야가)이며 대표작은 시집 <죽음의 소네트>이다. 두 번째는 1967년 과테말라의 소설가 미겔 앙헬아스투리아스이고, 네루다는 세 번째로 1971년에 받았다.

2. 안토니오 스카르메타(1940~)는 칠레 산티아고대학 졸업 후 미국, 아르헨티나, 독일 등을 전전(망명)하다가 1988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1985년 발표되었으며, 이 소설을 쓰는 데 14년이 걸렸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다.

3. 또한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요사는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비롯해 여러 책이 번역되어 있으며,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4. 네루다에 대한 전기는 애덤 펜스타인이 쓴 <빠블로 네루다>(2005년 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네루다의 시집은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민음사),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질문의 책>(문학동네) 등이 있다.

5.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보르헤스(Jorge Borges 1899~1986)의 <픽션들>, <불한당들의 세계사>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는 쿠바에서 태어났지만 2살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정착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작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반쪽짜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이 가장 유명하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