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잡설]

[논객칼럼=김부복]

 “이번에 조선 독립운동이라 칭하여 경성 기타에서 행한 운동이라는 것은 사리(事理)를 불변(不辨)하고 국정(國情)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 '내선동화'의 실(實)을 상해하는 것이라….”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후작’은 ‘3·1 독립운동’을 이렇게 깎아 내리는 글을 썼다. 1919년 3월 8일자 ‘매일신보’에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치 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것이다.

이완용은 3·1 운동을 “해외에 있으면서 조선의 현재 상태를 알지 못하는 무리가 조선의 독립을 기도, 민심을 선동해서 일으킨 불상사”라고 규정했다.

탑골공원에 있는 3.1 독립운동 부조@오피니언타임스

그러면서 ‘파리 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가 제출되었지만 “조선인은 사실상 ‘일·한 합방’에 열복(悅服), 동화(同化)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자는 ‘개무(皆無)’하다”면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은 모국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해외 주재자의 망동에 불과하다”고 우기기도 했다.

이완용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내선동화의 실(實)을 상해코자 하는 자는 자기만을 위하려는 가증스러운 무리”였다. 따라서 “허설에 선동되어 몸을 그르치고 세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 조선 사람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글을 끝냈다. 제목만큼이나 황당한 글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른바 ‘한일합방’을 반대했었다. 삼척동자도 ‘매국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완용이 왜 강제합병을 반대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연방국’이니 ‘합방론’이니 하면서 선수를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일진회의 송병준이 자기보다 먼저 ‘합방론’을 제기하자 우선 반대부터 한 것이다. 그래야 송병준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완용에게, 자기가 내놓지 않는 합방론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의 호감도 살 수 없었다. 오로지 ‘사리사욕’뿐이었다.

이완용의 ‘합방’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해 온양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은퇴를 권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데라우치가 총감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완용은 만사를 제쳐놓고 급히 상경했다. 우선 데라우치부터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합병안’을 제시하자 그 자리에서 찬성했다. 어전회의를 소집해서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이완용은 가족도 없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자신의 며느리와 간통을 하고 있었다. 아들 이명구(李明九)가 일본 유학을 떠난 사이에 며느리 임(任)씨를 덮친 것이다. 이명구가 귀국한 후 안채에 들어갔다가 이완용이 자기 아내를 끌어안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가정과 나라가 다 망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면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후 이완용은 며느리를 “마음대로 소유하여 희첩(姬妾)처럼 여기었다”고 했다.

가정과 나라를 다 망쳤으니 ‘인간 취급’을 받지도 못했다.‘매천야록’은 “서울 사람들의 변솟간에는 종종 이완용, 박제순의 성이 써 붙여져 있다”고 했다. ‘변솟간’은 오늘날 용어로 ‘화장실’이다.

사람들이 화장실에 큰 글씨로 ‘이박요리점(李朴料理店)’이라고 써서 붙인 것이다. “개와 한 가지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개의 요리’라면 ‘개☓’이다. 누군가가 담장 너머로 돌팔매질을 해서 이완용 집의 ‘장독 6개’가 일시에 박살난 사건도 있었다. 어린 소년이 이완용의 ‘자가용 수레’를 따라가며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가 구속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서 구걸을 하며 연명하던 어떤 조선 사람은 어렵게 은화(銀貨) 10원을 모으고도 배고픔을 참으며 한 푼도 쓰지 않고 버텼다. 그 이유는 “만일 이완용이 죽으면 부의를 하려고 하는데, 어찌 낭비를 하겠는가”였다. 머나먼 미국에서도 이완용의 사망 소식을 간절하게 기다린 것이다.

그랬으니, 이완용도 결국은 세상을 떠나야 했다. 1926년 2월 11일이었다. 그리고 2월 13일자 ‘동아일보’는 이완용의 ‘사망 논설’을 싣고 있었다. 제목은 “무슨 낫츠로 이 길을 떠나가나”였다.

“그도 갓다. 그도 필경 붓들려 갔다. 보호 순사의 겹겹 파수와 금성철벽의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듬 한아는 어찌하지를 못하였으며…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냐.…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엿든지 이제부터는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어허! 부둥켰든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노핫지! 앙랄하든 이 책벌을 인제부터는 영원히 바다야지!”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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