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현의 사소한 시선]

[청년칼럼=양재현]

말다툼의 승자를 가리는 법

유구하게 내려오는 삶의 지혜가 있다. 바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이다.

‘메라비언 법칙’에 의하면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 7%에 불과하고, 나머지 93%가 비언어적 요소에 달려있다고 한다. 이 비언어적 요소에는 태도, 자세, 복장, 목소리 등이 포함된다고 하니, 말싸움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내용의 완성도를 높일 게 아니라 목소리를 키우라던 옛 말은 실로 적절한 조언인 셈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면대면으로 목소리 높여가며 싸우던 세상을 넘어, 키보드로 싸우는 인터넷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인터넷 세상의 비언어적 요소

아마 텍스트가 오고가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비언어적 요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비언어적 요소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장 직관적인 비언어적 요소는 페이스북, 유튜브, 포탈 기사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좋아요’, ‘공감’ 수를 들 수 있겠다. 아무리 길고 논리정연하게 글을 썼더라도, ‘좋아요’보다 ‘싫어요’ 수가 많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틀린 글이라 간주해버린다. 뭐가 틀렸는지는 모른다. 다만 남들이 싫다고 하니 뭔가 싫은 것이 있을 것이라 넘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믿는다. 누군가는 이 글이 틀린 이유를 또 다른 게시글로 남겨 주리라고. 만약 그러한 게시글이 올라오면, 거기에 가서 ‘좋아요’를 클릭하면 끝이다.

사진 다음 홈피 캡쳐

한편, 좀 더 복잡하게 드러나는 비언어적 요소도 있다. 이러한 요소는 소위 ‘대형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인다. 다음 카페, 네이버 카페, 그 외 회원제로 운영되는 BBS 기반의 정보성 커뮤니티들이 이곳에 해당한다. BBS 기반의 커뮤니티에서도 ‘추천’ 기능은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 추천수에 따라 노출되는 SNS와 달리, 추천수에 상관없이 시간순으로 게시글과 댓글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에선 오히려 댓글과 조회수가 적음에도 추천수만 많다면 ‘음습하다’는 조롱이 달린다. 할 말이 없으니 추천만 누른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커뮤니티에서는 승리를 위해 고도로 머리를 굴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타난 비언어적 요소의 결정체가 마지막 댓글을 내 의견으로 다는 것, 일명 ‘막댓사수’이다.

마지막 댓글을 사수하는 이유

BBS기반 커뮤니티의 댓글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시간성이다. 처음에 달리는 댓글은 위에, 나중에 달리는 댓글은 아래에 달리는데,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것 같은 이 특징이 엄청난 비언어적 암시를 불러온다.

첫째, 뒤에 달리는 댓글은 당연히 앞의 댓글을 모두 검토 후 단 것일 거라는 암시.

둘째, 뒤에 달리는 댓글일수록 당연히 가장 최신 정보를 반영하리라는 암시. 앞의 댓글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옳은지는 상관없다. 댓글싸움이 지나간 마지막에 그에 반대되는 댓글을 다는 순간, 앞의 논리적이고 옳은 댓글은 이미 지나간 논쟁일 뿐이고, 가장 최근에 단 내 댓글이 최종적으로 합의된 의견이라는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교묘한 신경전은 웃지못할 행위를 창조해냈는데, 그 첫 번째 행위는 “자러갈게”라는 댓글 달기이다. 막댓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늦게 댓글을 달아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엄연히 ‘현생’이 존재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댓글을 다는 것을 그만둬야 하는데, 이는 곧 패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단어가 “자러갈게”이다. 이 속에는 “내가 재반박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거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두 번째 행위는 오래된 글에 댓글달기이다. 이미 한 차례 논쟁이 끝나 시들해진 글에 기어코 찾아가 댓글을 다는 것인데, 그 텀이 길수록 내 의견은 그동안의 모든 정보를 모아 최종 업데이트된 옳은 의견처럼 보인다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 이 행위는 미래에서 온 현자가 과거의 우매한 대중을 비웃는 듯한 기분도 덤으로 준다는 매력이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쓸데없는 소모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에서의 말다툼에는 관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 관객은 직접적으로 말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말싸움을 보며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심판 역할을 한다. 한편 이들 관객은 제3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싸움의 맥락과 말싸움에 동원되는 정보의 진실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판정에 활용할 수 있는 근거는 댓글의 실제 내용이 아닌, 누구의 댓글이 더 마지막에 달렸느냐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웃는다고 이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착시효과는 어디까지나 착시효과일 뿐이다. 내가 마지막에 댓글을 달았다는 것이 내가 모든 댓글을 다 읽고 판단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고, 내 의견이 최종적으로 합의된 의견이라는 근거 또한 더더욱 될 수 없다. 이러한 싸움은 상대방과 타협하기는 싫고 내가 이기고는 싶은 이기심의 발현일 뿐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수록 결국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협의는 살아지고 쇼와 퍼포먼스를 통한 힘겨루기만이 계속될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마지막 또한 언젠간 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과거는 역사가 되어 다시 재평가되고 심판받는다. 이를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해진다. 타인의 눈을 의식한 눈에 먼 막댓이 아니라, 이른 댓글이라 할지라도 내가 진정으로 알고 생각해 쓴 댓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내 댓글이 진정으로 옳은 댓글이라면, 믿고 기다리자. 분명 누군가는 그곳에 동조댓글을 남기고, 언제가 됐든 다시 끌어올려 줄 테니까.

 

양재현

사소해 내놓지 못했던 시선.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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