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 인사이트]

[논객칼럼=권오용]  한국과 중국 간에 사드의 배치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던 2016년 가을, 롯데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중국은 노골적으로 중국 내의 모든 롯데 매
장을 문닫게 하겠다며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드가 롯데 소유의 골프장에 배치됐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베이징에 출장 간 필자에게 중국의 지인은 롯데가 좋은 먹잇감이라고 얘기했다.일본에서 사업을 일으켰으니 일본 기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주력 사업장이 한국에 있으니 한국 기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롯데를 치면 중국 국민의 가슴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동시에 치는 듯한 느낌이 날 수가 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런데 그 후 롯데는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격화되자 일본계라는 이유로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면서 회장의 형은 일본에 살면서 가족 분쟁을 확산시켜가고 있었다. 일본에서조차 롯데는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창업자 신격호 회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니 일본 내에 신세진 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에 큰 소리를 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가 타계한 후에야 알려진 몇 개의 일화는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4전 5기의 신화를 창조한 프로복서 홍수환씨는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페더급 1차 타이틀 방어전을 1978년 2월 1일 도쿄에서 가졌다. 도전자인 가사하라 유와를 다섯 차례나 다운시키고 심판 전원 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자 신 회장은 다음날 도쿄에 서 카퍼레이드를 베풀었다.

 일본에서 일본 선수를 이겼는데 카퍼레이드라니? 홍수환 선수도 처음에는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 회장은 개의치 않고 카퍼레이드를 벌인 다음 홍 선수 일행을 모두 롯데 사무실로 초대했다. 그리고 홍 선수의 주먹을 만지며 “이게 일본 선수를 때려눕힌 손”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곁에 있던 일본인 임원들도 앞다퉈 홍 선수의 손을 만져봤다. 신 회장은 내심 그 당시 일본보다 못 살던 한국이지만 언젠가는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홍 선수를 후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한 민족의식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민족의식을 옆에 있는 일본인에게 과시하듯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반일 열풍이 몰아칠 때, 롯데는 때아닌 구설에 시달렸다. 일각에서는 한국 롯데의 대주주가 일본 회사인 만큼 불매운동을 벌이자고도 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에 쏟아부어 굴지의 세계적 기업을 일궜으니 오히려 배가 아플 일인데, 이 참에 롯데가 일본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현재 일본의 최고층 빌딩은 오사카의 지상 300m(60층) 아베노바시 터미널, 반면 국내 최고층은 555m(123층)의 롯데월드타워. 만약 신격호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포기했다면 우리는 롯데월드타워를 잃고 일본은 최고층 빌딩의 역사를 새로 썼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일본에서 돈을 벌긴 했지만 일본을 능가하는 그 무엇을 한국에 남겨 놓고 세상을 떴다.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바라 본 잠실롯데월드 타워의 모습. 타워 주변 옆의 아파트들이 작아 보인다@오피니언타임스

재계의 창업 1세대들은 대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일본어에 능했다. 또 그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쯤이면 일본이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어 일본에서 자료를 찾고 사람을 사귀면서 회사를 키워갔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의 뒤를 따라만 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본과 사업을 하면서도 일본을 능가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던 때 이바나 히데조 박사라는 일본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삼성전자의 이익은 일본의 10대 전자회사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일본의 마지막 D램 생산기업이었던 엘피다는 삼성과의 경쟁에서 패해 2012년 2월 도산했다.

극일도 이런 극일이 없다. 죽창과 의병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을 신격호나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이 이뤄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등소평(登小平)이 일본의 신일본제철 이나모리 요시히로 회장을 만났을 때 한국에 있는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 1978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자 이나모리 회장은 등소평의 심장부를 찌르는 의외의 대꾸를 했다. “중국은 안 됩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잖아요”였다. 확인되지 않은 등소평의 대답은 이러했다. “중국이 박태준을 수입할 수 없을까”.

박태준을 수입하는 대신 그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따라 했다. 중국은 6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81년부터 대량 아사를 낳은 스탈린의 수입 대체정책을 버리고 박정희의 수출 주도 정책을 따라 했다. 그러자 그토록 원했던 포항제철 수준의 종합제철소도 가지게 됐고 이제는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에서도 우리를 앞서나가고 있다.

또 하나,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시작하던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이 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자 중국은 경악했다. 그들이 특히 놀랐던 것은 기업인들의 공로가 컸다는 것. 당시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필두로 한 한국의 기업인들의 일하는 방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2년 뒤인 1983년 5월 5일 춘천에 불시착한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도 한국의 항공사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원만히 해결됐다. 당시 등소평이나 중국에게 대기업 육성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고, 한국의 경제 정책은 금과옥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역사에 언제 중국을 가르쳐 준 적이 있는가? 반만년 역사에서 중국은 항상 대국이었고 우리의 흠모 대상이었다. 그런 중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한국에 박태준, 정주영, 조중훈 같은 기업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아의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그 와중에 한국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 2%대의 성장을 감지덕지로 받아들여야 할 처지가 됐다. 동북아의 중심국가라는 구호는 실제 그 꿈을 실현시켜 줄 기업과 기업인을 뒤로한 채 정치적 수사로 변질돼 버렸다. 우리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동북아만 아니라면 어디에 가서도 중심국가로 행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국가는 인구나 영토나 경제력이나 모두가 우리보다 큰 나라들이다.

결국 역사 속에 딱 한 번 겪었던 동북아 중심국가로서의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 창업 1세대의 기업가 정신을 토대로 다시 혁신으로 무장하는 것이 꿈을 이루는 길이다. 정부도, 정치도, 사회도 기업인들이 맘껏 뛸 수 있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 팔을 걷어붙여야 할 것이다. 이는 신격호 회장을 마지막으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창업주 1세대들을 보내며 우리 앞에 던져진 크나큰 과제라고 하겠다.

권오용

한국CCO클럽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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