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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리아 칼라스로 불린 황금심[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2.19 08:03

[논객칼럼=이동순]

황금심@이동순

동서고금의 음반이란 음반을 모조리 수집하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와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다가 문득 가수 황금심(黃琴心:1922~2001)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지요. 그런데 선배는 대뜸 “그녀는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였어!”라는 충격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누린 프리마돈나 가수로 그야말로 오페라의 전설이었지요.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 등을 비롯한 삶의 파란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달림은 칼라스의 예술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감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힘, 매력적인 음색은 마리아 칼라스의 상표처럼 여겨졌지요. 여기에다 우아한 용모, 스타로서의 기품까지 갖추어 그야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오페라가수로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곧 선배의 말에 딴지를 걸었습니다. 아무리 황금심 노래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어찌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표정은 결연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다시금 귀 기울여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충고를 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들으면서도 저의 속마음은 못내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항상 서양음악에만 심취해 오던 선배의 관점 내부에 이렇게도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뜻밖의 놀라운 시각과 애착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30대 시절 무대에서의 황금심@이동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저는 1960년대 황금심 절정기에 취입한 음반을 매그나복스 장 전축에 걸어놓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몇 시간이고 들었습니다. 고즈넉한 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황금심의 노래는 과연 저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처연하게 스며들어와 저의 아프고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과연 선배의 지적에 충분한 일리가 있다는 동의와 공감이었습니다.

황금심 음반을 듣던 중에 저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하나의 아련한 실루엣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제가 소년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반, 한옥 고가에서 아버님과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마당에는 벽오동 한 그루가 우뚝 서서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지요. 힘겨운 가계에 보태기 위해 아버님께서는 꽃밭이 있던 담장 쪽 공터에 새로 방을 넣으셨습니다. 그 방에 40대 중반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과수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금심의 LP앨범@이동순

아침식사를 마치면 전축에다 곧장 황금심 음반을 올려놓고, 앞뒷면을 돌려가며 오후 해질 무렵까지 듣고 또 듣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습니다. 청소를 할 때도 저녁밥을 지을 때도, 한가한 시간 방바닥에 홀로 누워있을 때도 오로지 황금심만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도 황금심 노래만 들으면 그 과수댁 여인의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당시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적막한 삶을 아슬아슬 이어온 과수댁의 복잡하고 힘든 삶의 무게를 지탱해준 힘의 원천은 필시 황금심 노래였을 것이라고 이제 어른이 된 저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는 것이지요.

데뷔시절의 황금심@이동순

본명이 황금동(黃金童)이었던 가수 황금심은 1922년 부산 동래 출생입니다. 그러나 젖먹이 때 부모를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이주했었고, 7살에 덕수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4살 되었을 때 축음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는데, 어느 날 동네의 음반가게 점원이 골목을 지나다가 소녀의 기가 막힌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 오케레코드사 전속가수 선발 모집이 있었는데, 점원은 거기에 출전하기를 권했고, 콩쿨에 출전한 황금동은 당당히 1등으로 뽑혔습니다.

왜 못오시나요 가사지@이동순

드디어 1936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왜 못 오시나요'와 '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란 음반을 맨 처음에는 황금자(黃琴子)란 이름으로 처음 취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작사가 이부풍이 황금동을 빅타레코드사로 안내하여 전수린 작곡의 '알뜰한 당신'(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과 '한양은 천리원정'(조명암 작사, 이면상 작곡)을 취입하도록 했습니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 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안타까운 가슴속에 감춘 사정을/알아만 주신대도 원망 아니 하련만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

-'알뜰한 당신' 전문

황금심의 LP앨범@이동순

이 음반을 낼 때부터 예명은 황금심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분쟁의 화근이 될 줄 아무도 몰랐던 것이지요.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이화자의 창법을 압도하는 요소가 있다며 빅타레코드 회사에서는 반색을 했습니다. 예측했던 대로 이 음반은 공전의 대히트를 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가수를 졸지에 빼앗긴 오케레코드사에서는 황금동을 이중계약으로 법원에 고소를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가족들이 나서서 황금심을 빅타레코드사에 머물도록 하고, 분쟁을 겨우 무마시켰습니다.

빅타레코드사에서 나온 황금심sp음반-꿈꾸던 시절-라벨@이동순

작사가 이부풍, 작곡가 전수린, 가수 황금심! 이 트리오는 그 후 빅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간판격 음악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데뷔 시절, 서로가 탐을 내던 인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엄청난 소란에 휘말려 마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황금심은 그 어느 다른 레코드회사에서 취입을 제의해 와도 전혀 듣지 않고, 오로지 빅타레코드사에서만 충직하게 활동했습니다.

가수 황금심 노래에 가사를 담당했던 작사가로는 이부풍을 위시하여 시인 장만영과 박노춘 등이었습니다. 시인 김안서(김억) 선생도 김포몽(金浦夢)이란 필명으로 황금심에게 가사를 주었지요. 박영호, 고마부, 화산월, 이경주, 김성집, 산호암, 강남인 등도 황금심 노래의 가사를 몇 곡씩 맡았던 유명 작사가들입니다. 황금심 노래의 작곡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던 작곡가로는 단연코 전수린 선생입니다. 그밖에 형석기, 이면상, 박시춘, 문호월, 조자룡(김용환), 김양촌, 진우성 등도 몇 곡씩 맡아서 활동했습니다.

무대에서의 황금심@이동순

자, 그러면 일제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했던 황금심의 대표곡을 어디 한번 보실까요?

신민요 '울산 큰 애기'(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 빅타 49511), '마음의 항구' '알려 주세요' '청치마 홍치마' '꿈꾸는 시절' '여창에 기대어' '만포선 천리 길' '날 다려 가소' '한 많은 추풍령' '재 우에 쓰는 글자' 등입니다. 그밖에도 좋은 노래가 무척 많습니다.

1939년 4월에 발표한 '외로운 가로등'(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빅타 KJ-1317)은 전형적인 블루스곡입니다. 일제말 제국주의 압제에 지치고 시달린 식민지 백성들의 아픈 가슴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준 아름다운 작품이지요.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사랑에 병든 내 마음 속을 너마저 울어주느냐

 

가버린 옛 생각이 야속한 옛 생각이/거리에 시드는 가슴속을 왜 이리 아프게 하나

길모퉁이 외로이 선 서글픈 가로등이여/눈물에 피는 한 송이 꽃은 갈 곳이 어느 편이냐

 

희미한 등불아래 처량한 등불아래/죄 없이 떨리는 내 설움을 뉘라서 알아주려냐

심지불도 타기 전에 재가 된 내 사랑이여/이슬비 오는 밤거리 위에 이대로 스러지느냐

-'외로운 가로등' 전문

이 무렵 김용환이 조직한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의 주요멤버로 활동한 황금심은 노총각이었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이동열차 안에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10년,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부부는 악극단 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복수-황금심 부부@이동순

한국전쟁은 이들 부부에게도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고복수는 인민군에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고, 부부는 국군 위문대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52년 황금심이 취입한 '삼다도 소식'(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스타 KB-3002)으로 부부는 커다란 삶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노래는 남인수가 일제말인 1943년에 발표한 노래 ‘서귀포 칠십 리’(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와 함께 제주의 풍물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대중가요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황금심의 이 노래는 1950년대 초반 제주 모슬포 육군훈련소에서의 슬픔과 애환을 머금고 있는 가슴 아픈 노래였지요.

풍년가를 부르던 고복수-황금심 부부@이동순

삼다도라 제주에는 돌멩이도 많은데/발부리에 걷어챈 사랑은 없다든가

달빛이 새어드는 연자방앗간/밤새워 들려오는 콧노래가 구성지다/음 콧노래 구성지다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같이 희였구나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비바리 하소연에 물결 속에 꺼져가네/음 물결에 꺼져가네

-‘삼다도 소식’ 전문

황금심SP음반-뽕따러가세-라벨@이동순

이후 황금심은 '뽕따러 가세'(나화랑 작곡) 등으로 계속 인기를 이어가지만 경제적으로 몹시 힘들어졌고, 남편 고복수는 영화제작사업, 운수업 등 손대는 사업마다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고복수는 가수생활을 접고 은퇴하게 되지만 힘겨운 생활고는 고복수로 하여금 월부서적 외판원으로 차디찬 길거리로 헤매 다니도록 했습니다. 서울 종로 거리의 온갖 다방을 찾아다니며 유난히 커다란 신장으로 각종 전집물 도서를 한 아름씩 안고 다니며 슬픈 표정으로 떠돌이 도서판매를 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황금심도 생계를 위해 참으로 많은 분량의 노래를 취입하게 됩니다. 영화주제가, 연속방송극 주제가는 거의 황금심이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황금심SP음반-안녕히가세요-라벨@이동순

한국가요사를 통하여 ‘가요계의 여왕’ ‘꾀꼬리의 여왕’이란 칭호를 듣던 가수 황금심. 그녀는 1970년대까지 무려 1,000곡 넘게 발표했습니다. 말년에 파킨슨씨병을 앓으면서도 노래에 대한 애착이 변함없던 황금심은 드디어 2001년, 한도 많고 설움도 많았던 이 세상을 쓸쓸히 떠나갔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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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dslee5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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