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37]

[논객칼럼=김부복] ‘어진 임금’ 정조는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를 각별하게 아꼈다. 임금이 직접 박제가의 집을 방문할 정도였다. 정조는 박제가의 집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 ‘어애송(御愛松)’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임금이 사랑하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박제가는 젊었을 때 저술한 ‘북학의(北學儀)’를 요약, 정조에게 건의했다. 청나라를 여러 차례 여행했던 박제가는 경제부터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를 비롯한 모든 나라와의 교역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시장개방’을 주장한 것이다.

청나라에 있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초청, 그들의 앞선 기술을 배울 것도 제안했다. 비록 천주교를 믿는 이교도(異敎徒)이긴 하지만 불과 몇 십 명 정도만을 초청하면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며 초청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주장은 ‘병론(兵論)’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수레(車)는 병기(兵器)가 아니지만, 수레를 쓰면 짐수레로 이용할 수 있다. 벽돌은 병기가 아니지만, 벽돌을 쓰면 만민(萬民)의 성곽(城郭)을 갖출 수 있다. 백공(百工) 기예(技藝) 목축(牧畜) 등은 병기가 아니다. 그러나 삼군(三軍)의 전마(戰馬)와 전쟁에 쓰는 기기가 준비되지 않으면 이롭지 못하다…. 치고, 찌르는 기구와 방패를 만드는 것은 병기의 말(末)이다. 재능 있는 선비가 이용기구(利用器具)를 만드는 게 병기의 본(本)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구를 두루 갖추고 있으면 유사시에 병기로 전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막대한 물자를 투입해야 하는 오늘날의 총력전이나 소모전에도 적용할 수 있는 탁월한 견해였다.

자료사진@오피니언타임스

박제가는 따라서 “지금 취할 계(計)는 수레를 움직이고, 벽돌을 만들고, 목축을 잘하고, 백공 기예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산업을 장려해 생산을 늘리고, 기술력을 축적하면 국방 문제도 따라서 해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박제가의 ‘이론’은 실현되지 못했다. 수레를 만든다고 해도 통과할 ‘도로’가 없었다. 강을 건널 ‘다리’도 없었다.

당시 정조 임금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행(陵行)을 위해 1년에도 주교(舟橋)를 설치하도록 했다. 주교, ‘배다리’를 만들려면 관∙사유선(官私有船) 38척을 일렬로 띄워 놓고 그 위에 판자 1039매를 깔아야 했다. 그리고 호교선(護橋船) 12척으로 주교 좌우를 연결해서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그 배다리를 완성하는데 보통 20여 일 걸렸다. 그동안에는 한강의 수운(水運)이 중단되어야 했다. 당시 한강의 수운은 서울인 한양으로 드나드는 유일무이한 교통수단이었는데, 그게 막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주교를 설치할 때마다 한강 일대의 ‘사유선’을 징발했다. 백성에게는 고통이었다. 임금이 배다리를 건널 때는 3군의 장수들이 강 이편과 저편에 도열했고, 각(角)이며 북으로 풍악이 요란했다. 연산군의 경우는 시흥 청량산으로 사냥할 때 말 너덧 마리 도강시키려고 주교를 놓도록 하명하기도 했다.

도로 사정도 한심했다. 조선 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영국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은 “넓다는 것이 마차 둘이 통과할 수 없고, 좁은 길은 한 사람의 지게꾼이 내왕을 막을 정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경인가도’는 인마가 가장 붐비던 도로였다. 러시아 정부는 경인가도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용산촌에서 한강을 건너자니 다리가 없다. 그래서 나룻배 또는 쪽배를 이용한다. 이곳을 건너면… 곧장 인천으로 향한다. 이 길은 마른 날에도 심히 불편할뿐더러 비가 오면 전혀 통행할 수가 없다. 즉, 강우 시에는 한강이 양 언덕으로 범람하여 서울 부근의 도로 일부를 침범하고, 또 침범되지 않은 곳은 흙이 유해(流解)하여 진흙 밭이 됨으로써 차량의 통행이란 전혀 두절되고 마는 것이다.”

교통이 좋아야 사람의 왕래는 물론이고, 물자의 소통도 원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의지도 적었다. 학자 이병선(李秉璿)은 “만일 조선에 길이 넓고 다리가 튼튼했다면 잦은 외침으로 하여 조선의 역사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말에도 없었던 다리가 1500년 전인 고구려 때에는 있었다. 1981년에 발견되었다는 대동강 다리다. 길이 375m에 폭 9m인 나무판과 돌로 만든 다리라고 했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이어서 연결한 다리로, 깔판에 난간까지 갖추고 있던 다리였다고 한다. 413년 장수왕 때 건설된 다리로 알려졌다.

다리의 폭이 9m나 된다는 것은 ‘수레’가 통과할 수 있는 다리였다는 얘기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수레 여러 대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는 ‘4차선 도로’ 또는 ‘4차선 다리’다. 그 다리로 엄청난 물자가 옮겨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력을 추정할 수 있는 다리가 아닐 수 없다.

고구려 말의 수도였던 장안성에서는 폭 3.4m의 ‘3묘로’와 14m나 되는 ‘9묘로’가 있었다고 한다. 14m인 ‘큰길’은 수레가 다니는 도로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실위’에 철을 수출하기도 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으면 운반하기 힘든 게 철이다. 고구려의 수레는 묵직한 ‘쇳덩어리’를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대장장이 신, 불의 신 등을 숭배하며 기술자를 우대했다. 조선시대처럼 ‘사농공상’이 아니었다. 기술 선진국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고구려가 망했을 때 당나라는 ‘전리품’으로 수레를 챙기고 있었다. 호구 2만8200호, 소 3300두, 말 2900필과 낙타 60마리에, 수레 1080동이 포함되고 있었다. 어쩌면 ‘최고의 수레’만 골랐을 것이다.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1031∼1095)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수레를 베낀 듯싶은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외출할 때에만 타던 수레는 당나라 고종 때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려져서 타고 있다. …그런데 수레가 아직도 완전무결하다. 그 위에 앉으면 안정됨이 마치 산과 같고 한 잔의 물을 그 위에 올려두어도 요동하지 않는다.… 안정되고 편안하며 단단해 수명이 길지만 아직도 제작방법을 알 수가 없다.…”

당나라 고종이면 고구려를 침략했던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아들 이치(李治)다. 혹시 이치가 ‘전리품 수레’를 벤치마킹해서 완전무결한 수레 ‘한 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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