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청년칼럼=이광호] 글을 쓰다보면 두려움으로 가득 차는 순간이 있다. 내 글이 어떤 가치나 신념을 위한다는 핑계로 누군가의 삶을 소재거리로 전락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다.

그런 글은 누군가를 위해 쓰였다는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안전한 자리에서 문제적인 현상을 진단하고 조명한 채 수명을 다 할 뿐이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상훈도 부잣집 도련님인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자마자 가난을 잊는다. 가난을 ‘끔찍할뿐더러 부끄러운 생활’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박완서의 소설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삶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가난함을 체험과 경험의 소재로 이용하고도 ‘쉬 잊어버릴’ 수 있는 상훈과, 그 격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것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사회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은 불행이 아니라 불편'이라는 말을 반만 믿는다. 내게 가난은 불편이었지만 가난을 대상화 하고 상품화 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명백한 불행으로 변했다. 대학생을 상대로 한 쪽방촌 체험 프로그램,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가난을 체험하는 시설 등이 그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상을 받은 후 ‘기생충 반지하 집’을 복원하고 체험 시설을 조성하겠다는 계획 또한 이러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난의 전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누군가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가난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가난마저 빼앗아 가려는가.

영화 '기생충' @네이버 스틸컷

가난한 삶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데 인색하게 만든다. 좋은 집으로 이사 가자는 손녀의 말에 할머니는 “돈 있냐”고 되물을 수 있을 뿐이다. 할머니라고 이사 가고 싶지 않을 리 없다. 맛있게 먹는 것, 즐겁게 쓰는 것. 그런 것과 조금씩 멀어진다. 물건 하나를 사려고 해도 가성비를 따지고, 주어진 시간 앞에서도 효율을 따지게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삶이 일상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욕구를 억압한다. 그건 어쩌면 불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은 돈 앞에서 사람의 마음을 작아지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 속에서도 지금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계산하게 되는 삶은 불편과 불행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반가운 소식도 있다. 서울시는 반지하 주거형태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맞춤형 집수리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저소득층 반지하 1500개구 이상에 단열, 냉방 등의 공사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원래 반지하 주거공간은 건축법상 불법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불안이나 빈곤 등으로 인해 지하를 주거 공간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후 규정을 완화해 반지하가 법의 테두리 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대부분의 반지하는 채광이 거의 되지 않고, 습도가 높다.  최저주거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수리를 한다 해도 구조적 한계로 어느 정도의 개선 효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세를 들어 사는 사람이다. 세가 오르거나 형편이 나빠져 그 곳에서 떠나야 하게 된다면 거주자는 더 이상 혜택을 얻지 못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선된 집은 어찌 되었든 집주인 소유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 내외가 유리창 밖 인디언 텐트를 내려다보며 잠을 자는 사이, 기택 가족의 집은 침수된다. 빗소리가 들리면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삶은 영화 속 일이 아니다. 실제로도 반지하는 비가 오면 상습적으로 침수된다. 가난 체험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물 들어오니 노 젓는 것'일뿐이라는 말은, 이런 삶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거나 거리를 둔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 밖에서 팔짱을 낀 채 맹수를 감상할 수 있는 동물원처럼 말이다.

가난의 전시는 누군가의 삶이 발가벗겨지는 불쾌하고 불편한 일이다. 가난 체험으로 빈곤의 문제를 공감하고 이를 통해 제도적, 사회적 개선을 시도하겠다는 의도가 선하다 해도, 그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우선이다.

<도둑맞은 가난>에서 ‘나’는 가난의 냄새를 ‘부끄러워 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부모님과 오빠가 가난의 냄새를 혐오하다 자신만 남기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난이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산동네 골목은 가난하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힘차게 꿈틀거리고’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그러나 가난이 구경거리가 되고, 가난마저 상품화하는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하게 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가난의 전시는 가난의 냄새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나마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는 내 방에서 부잣집 도련님을 내쫓을 수라도 있었지. 이제는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정책 지원을 위해 가난을 증명하라는 사회의 의심과, 그 가난을 들여다보려는 시선은 외부에 있을 뿐이다. 가난이 삶인 사람들은 그 시선을 견뎌야만 가난할 수 있다.

묻고 싶다. 롤러코스터를 타되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야 하고, 동물원에 가되 우리 없는 맹수와 함께 대면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걸 선의에서 비롯된 체험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놀이기구에서 내려오고 나면, 동물원에서 나오고 나면 ‘쉬 잊어버릴’ 그 순간이 체험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런 삶이 일상이라는 걸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기정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그게 아니라 반지하 냄새야. 이 집을 떠나야 냄새가 없어진다고.”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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