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탄신 250주년 특별기획


다산 정약용의 대작 <경세유표>가 저술된지 195년 흘렀다. 경세유표의 원제는 <방례초본>이었고, 1817년 저술되기는 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저술의 숨결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

18세기말~19세기 초엽을 살던 다산은 당대의 최고지식인이었지만 또한 근심많고 동정심 많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나라의 기강과 근본이 무너지고 쇠망해 가는 모습을 근심했고, 백성이 굶주리고 도탄에 빠진 그 모습을 보고 한없이 탄식했다.
 
따라서 다산은 나라를 개혁하고 되살려보기 위한 근본방책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게다가 관직생활과 유배생활하는 가운데 얻은 생생한 체험까지 있었다. 그런 탐구와 체험을 모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경세유표>이다.

이 저작은 <주례>의 원리에 따라 관직을 천관이조, 지관호조, 춘관예조, 하관병조. 추관형조, 동관공조 등 6조로 구성하고 소관업무를 소상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토지제도, 지방행정, 도량형과 상공업, 과거제도 등 국가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방안을 제시한다.
 
이릍테면  도량형을 통일하고. 선박과 소금, 광산, 수레와 도로에 이르기까지 백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개선방안을 설명한다. 수레와 선박의 경우 표준화하고, 전쟁이 없을 때에는 전함을 조운이나 상선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기술과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 농기구, 베틀, 배, 수레 등의 제작을 전담할 관직 둬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렇지만 다산은 당시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여겼던 것 같다. 경세유표 전체의 절반 이상이 토지제도의 문란한 실상과 개혁방안에 할애돼 있다. 당시 토지제도의 문란과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황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 내가 오랫동안 시골에 살면서 전정의 문란함을 보고 참으로 눈물이 흘려내리려 한 적이 여러번이었다.”

 “ 받을 수 없는 자의 결세를 이웃이나 그 마을 사람에게 징수하고, 친족이나 인척에게 징수하되 방을 수색하고 땅을 파고 목을 달아매고 결박을 한다. 솥과 가마솥을 들어내고, 송아지와 돼지를 빼앗아 한 마을이 시끄럽게 되고, 우는 소리는 하늘에 진동하여 천지의 화기를 해쳐 쓸쓸해진 인가가 비참하게 된다. ”

이렇게 전정이 문란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주요한 요인이 토지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다 중간에 아전들이 간악하고 교활한 짓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지주에게 농작물의 절반을 갖다 바치고 나라에는 각종 명목의 세금과 준조세를 더 뜯기니 농민에게 남는 것은 10분의 3이나 되었을까? 그나마 흉년이 들어 먹을 것도 없는데 아전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뜯어간다. 더욱이 그렇게 억울하게 뜯겨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그 참상은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을까?

 “원통한 자가 하소연할 데가 없고, 억울한 자가 억울함을 펼 데가 없다.”

백성으로부터 뜯어가는 것이 많으면 국가재정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사실은 국가재정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했다. 이것도 역시 향리와 아전들이 횡포와 농간을 부린 탓임을 다산은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아전들의 나라’가 됐다고 탄식했다.
 
 “위로는 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벗겨내어 그 중간에서 살찌는 자는 탐학한 수령과 교활한 아전이니 아아!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요.”

그러므로 이런 피폐한 백성의 삶을 일으키고 쇠망해 가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다산은 중국에서 주나라 때 시행되던 정전제를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백성의 세금은 가벼워지고 국가재정은 넉넉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땅에만 매겨서 농민들만 괴롭히지 말고 다른 상공업 분야에도 부과하라고 권고한다. 세금을 고르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힘쓸 바는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박하게 하여 백성의 힘을 기르고 번식시키는 것이다.”

결국 <경세유표>에 담긴 근본정신은 위로는 나라를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튼튼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평안하고 넉넉히 하자는 것이었다. 

 경세유표가 나라의 토지는 왕의 것이라는 당시의 봉건적인 토지관념에 의거하여 쓰여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봉건왕조라 하더라도 나라와 백성이 융성해질 방안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다산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옛 성인과 어진 임금들이 세운 정전제를 시행하면 백성이 내야 할 세금은 수확의 9분의1로 줄어들어 생활이 윤택해지고 나라의 재정과 기강도 바로설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전통 봉건사회에서 왕이 권신과 아전의 입김을 배제할수록 비교적 풍요로웠다.
 
그런데 특히 다산이 살던 당시에는 토지제도나 환곡제도든 모든 것이 다 문란해진데다 흉년까지 겹쳐 백성의 피골이 상접해지자 근본해결 방안으로 정전제도 시행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엄청난 개혁이기에 중대한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의 주장에 대한 반박논리까지 준비한다. 현대 한국에서도 중요한 개혁안이 나올 때마다 기득권 세력이 갖가지 부작용을 들먹이며 반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바로 그런 모습과 다산의 저술이 참으로 닮았다.

물론 당시 세도권력은 다산의 개혁안에 귀를 기울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지주들의 농민 착취는 8/15 해방후 농지개혁을 통해서 간신히 정리되기까지 계속된다.

경세유표를 통해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측은해 하는 다산의 마음을 시종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다산이 그런 동정심만으로 경세유표를 쓴 것은 아니다. 선견지명도 탁월하다.

대표적인 것이 9품제를 기본으로 한 관직제도 개편방안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직이 정9품과 종 9품 모두 18품으로 돼 있었는데, 9품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9급으로 나뉘어 있는 오늘날의 공무원 제도를 이미 다산이 제창한 셈이다.

 오로지 과거에 의해서 인재를 뽑는 제도도 개선하고 숫자도 제한해야 한다고 다산은 강조한다. 서문에서도 “세상이 쇠미해질수록 과거에 뽑힌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지적한다. 나아가서 과거로 선발하는 방식과 나이제한까지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라는 번거로운 제도가 싫어 숨어사는 인재도 찾아서 기용해야 한다고 다산은 역설한다. 요즘 공무원을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사법고시만으로 선발하는 제도를 개선하자는 논의가 무성하다. 반면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고시에 매달려 청춘을 허비하고 낭인 신세가 되곤 한다. 이런 상황을 다산은 이미 예견했던 것일까? 

경세유표의 서술 방법도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할 때 경험적인 사례는 물론이고, 수치와 도표 그림까지 동원하여 서술한 것이다. 

다산은 당시 조정의 신하와 학자들이 관념론에 빠져 있었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신하들이 경연을 통해 왕이나 왕세자에게 강의할 때 ‘이기론’이나 ‘심성론’ 같은 추상적인 이론만 이야기했다. 백성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런 풍토에서 개혁론은 고사하고 새로운 저술방법도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다산은 똑같이 동양의 고전과 역사서를 참고하더라도 토지제도나 농사와 광업, 소금생산과 과세제도 등 아주 실질적인 문제를 집중 고찰하고 서술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나라의 앞날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다.  다산은 “진실로 지금이라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재앙은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 “터럭 만큼도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조선은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갈피를 못잡고 이 열강 저 열강에 붙었다가 끝내 나라를 상실했다. 그것은 결국 다산의 예언대로 나라를 개혁하지 않고 허송세월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다산이 서거한지 74년 지난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 직전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다 망한 나라에서  그런 시호를 받았으니 말이다. 과연 다산은 그렇게 망한 나라의 조정으로부터 시호를 받고 싶었을까? 단언하건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시호라면 차라리 물리치고 싶었을 것이다./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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