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92p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나요? 2020년 2월, 여기 대한민국은 여름이 한창입니다. 여름은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신영복 선생의 정의(定義)에 따르자면 말이죠.

코로나19라는 이름의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눈초리는 어딘가 많이 변했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마스크 위로 빼꼼 내민 두 눈동자는 기침하는 사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 얼굴에 홍조기가 있는 사람에게 폭염처럼 내려꽂힙니다. 물론 충분히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가 나를 병들게 할 지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죠. 당분간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할 수 밖엔,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한국에도 개와 늑대의 시간이 도래한 걸까요.

코로나 감염확산 방지를 위해 손씻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사랑의 일기' 학생들@사진 인추협

사흘전 버스에서 있던 일입니다. 마스크 입김으로 흐려지는 안경알 사이로 제 뒷자리에 할머님 한분이 앉으시는 게 보였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았고, 마스크를 착용하신 채였어요.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죠.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뒷자리에서 마른 기침 소리 두세번이 들렸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평소 감각이 둔하다는 말을 예사로 듣는 제가 특정한 소리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단 10~20초 사이에 제 머릿속은 한폭의 지옥도를 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낀 채 기침한건가, 침방울이 뒷목에 튀었으면 어쩌지, 내리면 물로라도 씻어야 하나 등등이요. 결국 저는 최대한 태연한 체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진 버스 출구 옆에 섰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부터 행선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할머니쪽을 쳐다보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할머니에게 행한 유일하고 알량한 배려였죠.

할머니는 제가 내리기 한 정거장 전 내리셨습니다. 제 착각이었을까요. 제 앞을 스쳐가는 당신은,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을 쳐다보더군요. 미안해요 학생, 과 같은 말이 이마 주름에 쓰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충분히 주의하는 다른 사람들을 힐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에도 저는 어쩐지 할머니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못들은 척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할머니의 얼굴은 조금이나마 덜 어두웠을까요?

신영복 선생이 약 21년간 감옥에서 통찰한 여름의 잔혹함을 저는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나와 마주치는 이들 전부를 못 견뎌하는 일의 피로감과, 타인을 그저 내게 해를 끼치는 –혹은 끼칠지 모를-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의 무참함 같은 거 말이에요. 습관처럼 바라본 휴대폰 포털 사이트 댓글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단죄의 장을 열고 있더군요. 끌어내려라, 죽여라, 가둬라 ... 정말이지, 누구에게나 가혹한 여름이라는 생각입니다.

해외만 나오면 애국자가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죠? 조금씩 박탈당해온 일상의 사소함이 자꾸만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주말밤 강남대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며 이유 모를 활기에 짜릿해 했던 순간이나, 마스크 속 비린내 대신 한껏 들이마시던 맑은 공기의 내음 같은 것들 말이죠. 불과 두달 전만 해도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은 왜 현재를 즐길 수 없게 된 순간에만 복기하게 되는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다시 만날 그날까지 무탈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름이 가고 봄이 오면, 카페에 마주앉아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어도 좋겠네요. 되도록 하찮고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말이죠. 곧 떠날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 얄미운 회사 동료에게 복수했을 때의 통쾌함, 옆자리 커플 중 누가 더 아까운지와 같은 사소한 것들에 관해 맘껏 떠들 수 있는, 그런 봄이면 좋겠습니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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