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성주의 태실이 들려주는 시대상을 읽어보자!

[논객칼럼=김희태]

태실(胎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장소는 단연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주에 세종대왕자 태실 이외에도 태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까지 성주에서 확인되는 태실은 크게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성주 태종 태실지 ▶성주 단종 태실지 등이 있다.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된 세종대왕자 태실과 달리 태종 태실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서삼릉으로 이봉된 뒤 태실지에는 민묘가 들어섰으며, 단종의 태실지는 세조가 즉위한 이후 당대에 훼손돼 현재 민묘가 들어섰다. 그 결과 태종과 단종의 태실지는 가봉 태실이었음을 말해주는 석물 일부만 남겨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위에서 언급한 성주의 태실을 중심으로, 현재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일부 왕자들의 태실이 훼손된 이유와 세조의 가봉 태실비가 세워진 이유는?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에 자리한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태봉산 정상에 세종의 왕자와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 등 총 19기의 태실이 밀집되어 있다. 이는 단일 태실로는 가장 많은 수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전기 태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의 특징점이라면 ▶세종의 왕자 태실 중 안평대군, 금성대군, 영풍군, 한남군, 화의군의 태실은 훼손된 채 기단석만 남아 있다는 점 ▶세조의 가봉 태실비가 조성되었다는 점 ▶왕자 당과 영해군 태실의 동일인 여부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유념해야 할 점은 문화재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점이다. 즉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면 분명 훼손된 이유가 있다는 점이고, 이러한 이유를 찾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을 포함해 총 19기의 태실이 조성되었다 @김희태

그렇다면 세종대왕자 태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보이는 다섯 개의 태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영풍군과 한남군, 화의군의 태실이 훼손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당 태실의 현재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근에 있는 세조의 태실과 연계해서 봐야 한다.  세조(=진양대군, 수양대군, 재위 1455~1468)는 계유정난(1453)을 통해 조정을 장악한 뒤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계유정난으로 인한 귀양, 사사)과 금성대군(단종 복위 운동, 사사), 영풍군(=혜빈 양씨 자, 세조와 대척점), 한남군(=혜빈 양씨 자, 귀양 후 병사), 화의군(=영빈 강씨의 자, 단종 복위 운동의 연루)의 경우 세조와 대척점에 있거나 대립구도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이들 태실이 온전히 남아 있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안평대군의 태실, 태실비가 훼손이 되고 장태 석물 역시 기단석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김희태
 금성대군의 태실, 훗날 상왕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금성대군은 세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김희태

한편 세종대왕자 태실 가운데 세조의 태실에만 별도의 가봉 태실비가 세워져 있는데, 보통 왕위에 오를 경우 단종의 사례처럼 별도의 길지를 찾아 태실을 이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세조는 예조에서 올린 주청을 거부하고, 대신 기존의 표석은 없애고, 별도의 비를 세워 다른 왕자의 태실과 구분하도록 했다. 이때 세운 비석이 현재 세조 태실에 남아 있는 가봉 태실비로, 현재 가봉 태실비의 경우 비문의 훼손이 심해 육안 판독은 어렵다.

그럼에도 『세조실록』에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다. 언뜻 세조라고 하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비정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가봉 태실의 조성도 그렇고, 자신의 능인 광릉의 조성 때 기존의 석실묘가 아닌 회격묘로 바꾼 것 역시 세조였다. 당시 태실이나 능을 조성하는 것은 국가적인 역량을 모아야 했다. 그랬기에 세조의 이 같은 행동은 공사에 동원될 백성들의 어려움을 경감시키기 위한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세조의 가봉 태실비, 예조에서 별도의 길지로 옮겨 태실을 조성할 것을 상소했으나 세조는 이를 물리치고, 태실비만 새로 세울 것을 지시했다 @김희태

왕자 당 태실. 기록에는 없는 인물로 크게 영해군과 동일 인물로 보거나 혹은 기록되지 않은 19번째 왕자라는 견해로 나뉜다 @김희태

또한 세종대왕자 태실의 배치를 보면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을 제외하면 18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세종의 가계를 보면 18남 4녀를 두었기에 일면 숫자가 맞는 것 같지만, 세자였던 문종의 태실은 예천 명봉사에 조성되었기에 17기의 태실이 있어야 맞다. 그런데 18기가 자리하고 있으니, 1기의 정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태실은 왕자 당의 태실이다. 왕자 당은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인물로, 태실비를 보면 앞면의 우측면에 '당태장(瑭胎藏)'이, 좌측면에는 '황명정통칠년임술십월이십삼일경술입석(皇明正統七年壬戌十月二十三日庚戌立石)'이 새겨져 있다. 정통 7년을 환산해보면 1442년(=세종 24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영해군의 이름이 최초 장(璋)이었다가 후에 당(瑭)으로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왕자 당 태실과 영해군의 태실을 동일 인물로 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 세종의 19번째 아들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왕실 족보에서 누락이 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성주 태종 태실지, 태실의 조성 뒤 성주목으로 승격되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산 65번지의 태봉산 정상에는 태종의 태실이 있었다. 하지만 태종 태실지에는 민묘가 들어서 있어 태실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예전에는 민묘 주변으로 태실 관련 석물이 흩어진 채 방치되고 있었으나, 지난 2015년 성주군청에서 남아 있는 태실 관련 석물을 수습해 현재는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태종 태실의 조성과 관련해서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태종은 여흥부원군 민제(閔霽)를 안태사로 삼아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를 봉했다. 이때 민제는 함주(咸州)로 가서 태종의 태를 찾아 조곡산으로 이동을 했다. 여기서 함주는 이성계의 지지기반인 동북면, 지금의 함흥 일대를 이야기한다. 태종이 태어날 때는 아직 조선이 건국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태실이 조성되지 않고, 민간의 풍습에 따라 매태(埋胎)와 같은 방식으로 태를 처리했음을 시사한다.

성주 태종 태실지의 전경, 현재 민묘만 남아 있을 뿐, 태실 관련 석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김희태
성주 태종 태실지(2015년). 묘역 아래 난간석이 보인다 @ 사진 제공 : 성주군청
중앙 태석 가운데 개첨석 @사진 제공 : 성주군청
 태함의 개석 @사진 제공 : 성주군청

그러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함주에 있던 태를 찾아 경산부의 조곡산으로 옮겨 가봉 태실을 조성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태종의 어태를 조곡산에 안장한 결과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조곡산과 관련한 기록이 있는데,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의 태를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태종의 태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옮겨지게 되는데, 『태봉』에 따르면 태실의 봉출 시기가 1928년 8월 12일~13일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봉될 당시 태지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태항아리의 존재는 확인된 바 있다. 여기에 당시 스케치한 태실 관련 석물이 남아 있어 태종 태실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 일부 석물만 간신히 남아 있는 성주 단종 태실지

​주변 사람들에게 단종의 태실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경상남도 사천이라는 답을 듣게 된다.

정말 단종의 태실은 사천에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문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기록을 통해 동궁(東宮)의 태실(胎室)을 성주 가야산(伽倻山)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즉 단종의 태실이 최초 선석산에 있다가 성주 가야산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에 있는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의 태실비와 장태 석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세조실록』을 통해 단종의 태실이 법림산(法林山, 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태실이 파괴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입증하듯 법림산의 단종 태실지 현장에서는 단종의 가봉 태실과 관련한 우전석과 상석 등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주에 있었던 단종의 태실은 어째서 사천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성주 단종 태실지. 우전석 1매가 눈에 뛴다 @김희태
우전석, 태실 가봉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석물이다 @김희태
태실지에 조성된 민묘. 자세히 보면 태실 관련 석물을 재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698년 숙종의 의해 노산군이 단종의 묘호를 받게 된 시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 왕의 지위를 회복했기에 자연스럽게 노산군 묘에서 장릉(莊陵)으로 능호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단종의 태실 역시 수개(修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가야산 자락의 법림산에 있던 단종 태실지는 실전이 된 상태였다. 대신 사천 세종대왕 태실 인근의 인성대군 태실이 단종의 태실로 잘못 알려진 결과 인성대군의 태실에 가봉 태실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단종의 태실을 이봉하는 과정에서 단종의 태지석이 아닌 인성대군의 태지석이 출토된 것이 명백한 증거로, 인성대군의 태실이었음은 명백하다. 또한 태실을 수개하는 과정에서 태함을 개봉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단종의 태실이 성주에서 사천으로 이봉 되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망주석 아래의 석물. 전석을 뒤집어 사용한 것으로, 묘에서는 이 같은 재활용된 석물이 5기가 확인된다 @김희태
답사 과정에서 추가로 확인된 우전석 @김희태
사천 단종 태실지. 인성대군의 태실이 단종 태실로 잘못 알려진 결과 단종의 가봉 태실 석물이 조성이 된 것이다 @김희태

이러한 내용을 종합했을 때 태실을 부르는 명칭 역시 성주의 경우 단종 태실지, 사천의 경우 ‘傳 단종 태실지’ 혹은 ‘단종 가봉 태실 석물과 인성대군 태실’로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법림산에 위치한 단종 태실지의 경우 태실지에 민묘가 들어선 상황으로, 지난 2012년 지표조사 결과 노출된 우전석 1매와 묘의 석재로 활용된 상석 2매과 전석 3매가 확인된 바 있다. 또한 최근 답사를 통해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없는 우전석 1매를 추가로 확인했는데, 태실지에서 불과 20m 아래 일부 노출이 된 상태로 흙과 이끼에 덮여 있었다.

이는 해당 태실지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이내로 지표조사를 실시할 경우 추가 석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지점이다. 또한 발굴조사에 따라 추가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역사의 현장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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