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 인사이트]

[논객칼럼=권오용]

한진(韓進) 그룹의 사명은 한(韓) 민족의 전진(進)을 뜻한다. 창업주 조중훈 회장이 1945년 직접 작명했다. 그만큼 한진그룹은 우리나라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한국의 국력 증가로 한진이 지금처럼 클 수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지만 한진이 한국경제의 전진에 기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필자가 전경련의 신입사원 시절이던 1980년대 초반, 정주영 회장이 이끌던 전경련에 조중훈 회장은 부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개성이 강한 창업주들의 모임에 충돌이 없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은 정주영 회장과 조중훈 회장이 언쟁을 벌이다 성질 급한 조회장이 회의장을 뛰쳐나오는 일까지 있었다. 화가 난 조회장이 자신의 차가 오는 시간을 못 기다리고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 타고 갔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한진해운의 선박 건조를 현대가 아닌 외국에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건조 자금을 일본에서 지원받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현대 측은 중동 근로자 송출 등 자기회사 사원의 KAL 이용을 억제, 전체 항공 이용 인원의 18%만이 KAL을 탔다.

사진 한진칼 홈피 캡쳐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중훈 회장을 높게 평가했다. 정 회장은 88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조회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의 회고록에는 조회장 외의 어떤 경제인도 이름이 적시되지 않았다. 조회장이 IOC 위원들의 한국 방문을 주선하고 기꺼이 왕복항공권을 제공한 것이 개도국 출신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아울러 한·프랑스 경제협력위원장으로서 유럽 지역의 거점을 확보해 줬다는 것에 대하여도 각별히 언급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동남아의 한 IOC 위원이 몸이 아파 못 오게 됐다. 이 얘기를 들은 조회장이 전세기를 보내겠다고 하자 이에 감동한 그 IOC 위원이 아픈 몸을 끌고 직접 바덴바덴까지 와서 서울 개최에 찬성표를 던졌다고도 한다. 사업을 두고 다투기는 했어도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있어서는 라이벌이 없었다. 한민족의 전진을 바라고 회사 이름까지 작명한 그 정신을 조중훈은 그대로 실천한 셈이었다.

한민족의 전진을 바라는 조중훈의 창업 이념은 한진의 기업문화로 대를 이어 계승됐다.

조양호 회장은 재계에서 알아주는 국제통이었다. 그가 조석래 회장과 함께 한·미 재계 회의를 맡아서 이뤄낸 가장 큰 업적은 한·미 비자면제협정의 체결이었다. 처음 이 문제가 이슈가 됐을 때 재계는 남의 일로 치부했었다. 사실 전경련의 회원사는 비자 때문에 미국에 들어가기가 불편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양호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남의 나라 대사관 앞에서 노숙을 하며 장사진을 치는 모습은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광경이었다. 조양호 회장은 한·미 재계회의에 비자 분과위를 만들어 대한항공의 이종희 사장을 위원장으로 해 실무작업을 맡겼다. 국민들의 마음속 짓눌린 상처를 낫게 해주고 자부심을 되살려주려는 재계의 노력은 1996년에 시작되어 2008년에야 마무리됐다. 미국 정부가 한국을 비자 면제 프로그램의 신규 가입국으로 포함시키면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조양호의 마음도 결실을 맺게 됐다. 한민족이 또 한 걸음 전진한 순간이었다.

지금 대한항공은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항공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공항은 공장이다.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공항에서 공항까지 이동시켜주고 돈을 버는 것이 업이다. 그런데 공항이 공터가 됐다. 떠나는 비행기도 들어오는 비행기도 없다. 공항이 생긴 이래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셈이다. 장사하기도 어려운 판에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까지 생겼다. 대한항공의 위기는 우리나라 항공 산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위기 극복에는 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이다. 경험에서 체득된 실사구시의 기업문화가 절대 필요하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가 닥쳤다. 대한항공은 동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도색까지 삼갔다. 이 때문에 “비키니 차림의 점보기”라는 애칭도 생겨났다. 도색할 경우 6드럼이 소요되는 칠 무게가 비행기를 무겁게 해 연간 5천 갤런 이상의 연료가 더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기 극복의 DNA가 대한항공 구성원들에게는 오랫동안 체화돼 있다. 이것이 기업문화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한 저력을 기업문화로 가지고 있다. 대한항공의 노조가 총수인 조원태 회장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이례적이기는 해도 기업문화의 힘이다. 노조가 직접 소액주주 규합에 나선 것도 기업문화의 승계야말로 위기 극복의 원동력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본이득(Capital Gain)을 염두에 둔 펀드 자본이 기업문화를 계승할 이유가 없다. 업의 본질에 대한 식견도, 경험도 없는 경영자가 위기 극복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없다. 배워서 하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없고 당면한 위기 또한 너무나 크다. 더욱이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인 조현아 전 부사장이 경영에 참여한다면 그 자체로 위기 극복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져 버릴 것이다. 국민들의 성원과 지지 또한 멀어질 것이다.

이번 27일 열리는 한진칼의 주주총회는 외견상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한민족의 전진을 바라고 자라온 한진그룹이 기업문화의 승계자로 누구를 선택하느냐를 판가름 짓는 자리다. 부디 시장의 현명한 선택으로 이번 주주총회가 한진그룹을 둘러싼 모든 악재를 털어내고 위기 극복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케 할 기업문화를 다시 충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권오용

전 SK 사장

(재)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CCO클럽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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