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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곡가는 어떻게 살인마가 됐나-탁성록(卓星祿) 이야기[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4.03 03:50

[논객칼럼=이동순]

1. 대중음악인 탁성록

오늘은 평범한 대중음악인의 삶을 살다가 아편중독을 거쳐 살인마로 변신했던 한 괴기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불가해한 인간의 사례는 참 많고도 많겠지만, 진작 영혼과 인간성이 무참하게 망가져버린 탁성록(卓星祿, 1916~?)이라는 비루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새삼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와 숨 막히는 고통마저 느끼게 합니다. 역사는 그 건강성을 유지하도록 늘 관리해야만 합니다. 이를 망각하고 우리가 방심할 때 어떤 무서운 환난이 발생할 수 있는지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탁성록은 20세기 초반, 경남 진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진주는 일찍이 대중문화의 산실이며, 명망 높은 대중문화인들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제작자이자 주제가를 만들었으며 당대 최고의 유명변사로 영화감독이었던 김영환(김서정),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 ‘노들강변’의 작곡가 문호월, ‘가요황제’로 불렸던 가수 남인수, ‘조선의 슈벨트’로 불렸던 작곡가 이재호, 또 그의 제자였던 작곡가 이봉조, 가수 이한필(위키리) 등이 모두 진주 출신이거나 진주에서 성장한 인물들입니다. 이 명단의 끝에 우리는 탁성록이라는 악마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도 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시대 대중문화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장기에 지역 선배들의 빛나는 활동과 업적으로 크게 고무되고 자극을 받았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SP음반문화의 발달로 말미암아 형성된 대중음악사의 성세가 한창 보편화되고 있던 무렵, 탁성록도 이 기류에 편승하여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타고난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대로 된 음악공부의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지만 유난히 뛰어난 음감(音感)에다 기타를 비롯한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까지 곁들여져 탁성록은 자연스럽게 지역 대중문화인들과 어울렸고, 나중에는 서울로 진출하여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안정된 전속작곡가로 자리를 잡아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콜롬비아레코드사 전속작곡가 시절의 탁성록@이동순

먼저 음악인으로서의 탁성록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의 궤적은 주로 작곡 쪽이었는데, 음반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다 보니 간혹 작사에도 관여했을 뿐 아니라 드물게 가창(歌唱)으로 음반취입까지도 과감하게 시도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발표한 가요작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음반들은 콜럼비아레코드와 그 자회사였던 리갈레코드사 상표를 달고 발표된 것입니다.

'광야의 달밤'(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6), ‘포구의 회포’(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채규엽 노래, 1936), '내 갈길 어듸메냐'(김백오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6), ‘정든 포구’(천우학 작사, 탁성록 작곡, 박윤선 노래, 1937), '낙동강의 애상곡'(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7), '네온의 파라다이스'(현우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7), ‘애수의 포구’(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김인숙 노래, 1937), ‘애원의 외쪽길’(박영호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8), ‘유랑의 곡예사’(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유종섭 노래, 1938), '눈물의 항구', '제주도 아가씨'(부평초 작사, 탁성록 작곡, 남일연 노래, 1941)

탁성록이 작곡한 '낙동강의 애상곡' 가사지@이동순

몇 곡 더 목록에 추가될 가능성이 있겠지만 탁성록 작곡의 작품은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단 한 편도 히트한 곡이 없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전체 작품들의 목록을 두루 살펴보면 1930년대 중후반 당시 대중음악계 특유의 일반적 분위기였던 애상조, 비탄조의 흐름으로 일관된 특징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일본 엔카 요나누키 풍의 색조가 유난히 두드러져 대중들의 기호를 그리 만족시켜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탁성록과 자주 어울렸던 작사가로는 시인 이하윤이 있고 가수로는 함북 회령 출신의 신인가수 유종섭이 눈에 띕니다. 당시 탁성록과 함께 활동했던 비중 높은 유명 가수로는 채규엽과 남일연이 보이지만 그들과도 히트곡을 내지 못했습니다. 기타 가수들은 박윤선, 김인숙 등 거의 존재감이 없는 신인들입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탁성록은 작곡가로서 콜럼비아레코드사에 전속이 되긴 했지만 히트곡을 단 한 곡도 내지 못해서 2군 그룹에 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다 김준영, 홍난파, 임헌익 등 일본유학을 다녀온 정규코스 출신의 대중음악인들에게도 밀려 이렇다 할 뚜렷한 학력을 갖지 못한 탁성록은 항시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대중음악계에서 탁성록과 그래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선배 작곡가로는 밀양 출신 박시춘이 유일합니다. 탁성록이 대중음악계에 끼친 유일한 공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고향후배였던 강문수(남인수)의 재능을 일찍부터 발견하고 1935년 시에론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 박시춘에게 추천해서 데뷔곡 ‘눈물의 해협’을 발표하게 이끈 일입니다. 남인수도 생전 어느 라디오 공개방송 무대에서 탁성록의 인도로 가수가 되었던 경과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비록 그 곡은 히트를 하지 못했지만 동일한 노래의 악보에서 가사만 다시 바꾼 ‘애수의 소야곡’으로 오케레코드사에서 크게 히트시킬 수 있었던 단초(端初)를 탁성록이 제공했던 것이지요.

 

2. 원곡 ‘글루미 선데이’와 번안가요 ‘어두운 세상’

주된 활동영역이 오로지 작곡 쪽이었던 탁성록은 1937년, 뜬금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취입된 음반을 하나 발표를 합니다. 제목은 ‘어두운 세상’(팽환주 작사, 문예부 작곡, 탁성록 노래, 리갈 째즈송, 1937)입니다. 이 노래의 원곡인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발표가 1933년이니 불과 4년 뒤 식민지 조선에서 번안가요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난 여러 일들을 떠올리면 그것은 그다지 축복할 만한 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리갈레코드 C-412번으로 발표된 이 음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곡 '글루미 선데이'의 번안가요, '어두운 세상' 가사지@이동순

꿈같이 그리던 그 얼굴 더듬고

봄 하루 외로이 지내는 내 설움

언제나 또 다시 네 이름 새겨서

다 묵은 추억에 이 밤을 새울까

마음에 내 고향 가버린 옛날을

노래에 취하여 잊어나 버릴까

내 노래 찾아

 

사랑도 떠나고 봄꽃도 저버려

밤마다 맺히는 눈물의 곡절에

마음의 장식도 쓸쓸히 마쳐서

이 세상 뱃길을 내 홀로 떠나리

이슬에 깊은 잠 네 모양 사모해

풀잎을 헤매어 내 노래 찾으리

내 노래 찾아

-‘어두운 세상’ 전문

작곡가 탁성록이 어떻게 해서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취입한 음반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일까.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글루미 선데이’의 음원을 처음 들어본 탁성록으로서는 자신의 낙망, 열패감, 상실감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탁월한 효과를 느끼면서 단번에 몰입되고 심취해버린 듯합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글루미 선데이’의 출현배경과 이후의 경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노래에는 우선 ‘저주의 노래, 죽음의 노래’란 불길한 명명이 항시 따라다닙니다.

1999년에 제작 개봉된 영화 '글루미 선데이'는 1933년에 발표된 한 옛 가요 ‘글루미 선데이’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이지요. 원곡 가요는 시인과 피아니스트의 합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노래에 내재된 어떤 허무주의적, 퇴폐주의적 음울한 기운 때문에 전 세계 수백 명의 청년들로 하여금 자살로 빠지도록 이끈, 몹시 무섭고 뒤숭숭한 전설이 따라 다닙니다. 구체적으로는 무려 187명이 이 노래 때문에 자신의 삶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고 하네요. 이른바 베르테르효과로 납득할 수는 있겠습니다.

원곡이 발표된 지 3년 뒤인 1936년 4월, 프랑스 파리의 한 콘서트 현장에서는 저주의 기운이 가득 담긴 노래 ‘글루미 선데이’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콘서트가 한창 진행되던 중 드럼 연주자가 돌연히 권총을 꺼내어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고 발사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충격적인 사태로 공연장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겠지요. 보나마나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콘서트였을 것입니다. 발표된 뒤 여러 해 동안 별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 노래가 그날 콘서트 중 발생한 자살사건으로 말미암아 단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노래의 작곡가 레조 세레즈는 당시 연인을 잃은 처절한 아픔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온갖 비극적 경험을 두루 겪은 작곡가마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30년 세월이 흐른 뒤인 1968년 겨울, 자신의 작품 ‘글루미 선데이’를 틀어놓고 고층빌딩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원곡을 실마리로 해서 만든 영화작품에는 남녀의 엇갈린 사랑, 치열한 복수가 펼쳐지지요. 몹시 을씨년스럽습니다. 헝가리 정부에서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노래 ‘글루미 선데이’에 대하여 '수백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는 헤드라인으로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영화는 롤프 슈벨 감독이 제작했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에는 그 어떤 불가해한 저주의 기운, 죽음의 기운과 같은 불길한 기운이 서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듯합니다.

탁성록이 부른 ‘글루미 선데이’의 번안가요, ‘어두운 세상’을 반복해서 몇 차례 들어봅니다. 도입부의 분위기는 무겁고 둔중합니다. 전주곡과 간주곡 부분의 느낌은 무언가 쿵! 하고 불쾌한 일이 일어날 듯한 예감이 전해져 옵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탁성록의 전반적 정서는 몹시 불안정하게 다가옵니다. 발음도 어딘가 불분명하고 군데군데 혀가 꼬여있는 듯합니다. 작곡가라지만 음감도 미숙하게 느껴집니다. 2절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발성마저 겨우 뽑혀 나올 뿐 아니라 감정의 안정된 배분이 흔들리고 있네요. 표준어발음이 다소 거북한 경남 진주 출신임을 감안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부족합니다. 각 소절마다 일정한 곳에 규칙적으로 호흡의 휴지(休止)를 두는 것은 가창의 기본일 터인데도 탁성록은 이런 기본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호흡을 주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돌발적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음반에 담긴 노래는 음악성의 기본적 조화로움과 생명력을 상실한 몹시 부실한 가창으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자회사인 리갈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발매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탁성록은 어떻게 취입 관계자를 꼬드겨서 이처럼 수준미달의 음반을 발매했던 것일까요? 이런 배경을 지닌 음반이니 당연히 대중들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쉽게 잊어지고 말았겠지요.

탁성록의 노래 ‘어두운 세상’ 취입과정이 보여주는 불안하고 석연치 않은 배경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시기에 탁성록은 필시 모르핀중독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약의 기운이 떨어진 불안한 상태에서 그는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섰을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대중음악인들이 모르핀이나 필로폰, 대마초를 몰래 흡입하는 까닭이 무대공포증을 이기고 정확한 음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어설픈 변명을 우리가 처음 접하는 바는 아니지만, 탁성록 음반을 통해 듣는 가창은 아무리 인내심을 갖고 들어도 차마 편안한 마음을 갖기가 힘이 듭니다.

결국 탁성록은 비전문가로서 내지 말았어야 할 음반을 무리하게 취입 발매하였고, 이 불길한 감성과 병적인 기운으로 가득 찬 음반은 식민지시대 후반기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던 대중들의 지치고 곤비한 심신을 한층 힘들고 고달프게 억압하는 파행(跛行)과 둔주(遁走)의 효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원래 가창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었음에도 무리수를 두어서 이다지 어설프고 미숙한 창법으로 고유번호까지 달고 있는 음반을 버젓이 발매했으니 이 얼마나 겸손과 분별을 잃은 뻔뻔한 처사인지요?

이것은 마치 일제말 시인이었던 미당 서정주가 자신의 고유영역인 시 장르뿐만 아니라 소설, 산문 등 여러 장르로 불필요한 확장을 시도해가면서 군국주의 체제의 옹호와 강화에 열과 성을 다했던 반민족적 행위와 버금가는 무분별한 일탈이 아닌가 합니다.

3. 아편중독자가 된 탁성록

진짜 괴롭고 힘든 일들은 음반 ‘어두운 세상’ 발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탁성록이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서 이렇다 할 히트곡을 전혀 생산해내지 못한 채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이 시기 탁성록은 그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편에 급격히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약이란 것은 일단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만 그 미혹(迷惑)의 세계와 인연을 끊기란 죽음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몰래 숨어서 비밀리에 주사를 맞던 아편이 차츰 중독 상태가 깊어지면서 주변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모욕에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아편쟁이 탁성록은 점점 무감각해져 갔고, 이에 따라 대중음악인으로서의 그의 존재감도 희박해져 갔지요. 당시 아편으로 인한 만성중독으로 폐인이 된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가수 이화자, 송달협, 윤부길 등 유명 대중음악인들의 상당수가 아편중독으로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 가쁜 일제말 흉물스런 작태가 여러 해 동안 이어지던 시기에 탁성록은 마약중독자로서 아주 비천한 밑바닥 삶을 전전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와중에서 다시 갱생의 길을 찾으려고 여러 차례 안간힘으로 마약을 끊어보려는 시도를 더러 했을 터이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아편중독에 대한 몇 가지의 지식을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중국 근대의 아편중독자들@이동순

아편(鴉片)은 양귀비라는 식물의 유액에서 추출되며, 약물의 종류는 모르핀 등 20여 가지가 넘습니다. 합성하여 다양한 마약을 만들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헤로인이 가장 위험물질이라 하겠습니다. 일단 아편 종류의 약물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모르핀, 헤로인, 메타돈, 메페리딘, 코데인, 펜타닐 등이 있습니다. 아편 계열의 약물을 투여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먼저 불안 감소를 들 수 있습니다. 이어서 무감정, 의식혼탁, 진정, 행복감, 기분고양, 자존심 증가 등을 찾아볼 수 있지요. 헤로인을 투여했을 때는 짧은 시간 동안 극대화되는 만족감은 형언할 수 없는 도취의 세계로 이끌어 들입니다. 이것 때문에 마약을 자꾸 반복적으로 찾게 되지요. 그리고 순간적으로 경험되는 야릇한 쾌감, 성적인 절정의 느낌, 화끈거리는 느낌 등등 다양한 반응은 마약을 잊을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아편이나 헤로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약물에 대한 내성으로 효과는 현저히 감소하게 됩니다. 이어서 심각한 중독 증상과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 부작용은 동공이 축소되고, 혼수상태가 지속되며 급기야 호흡곤란으로 이어집니다. 저혈압이 유발될 뿐만 아니라 급격히 체온이 저하되며 심할 경우 온몸을 와들와들 떨게 되는 경련현상이 일어납니다. 변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피부 청색증이 나타나며 폐부종으로 위험을 겪기도 합니다. 마약중독자의 얼굴이 푸르스름한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정상인에게서 나타나는 반사작용이 현저히 감퇴되며, 맥박이 몹시 느려지고 심할 경우 호흡장애와 혼수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극심한 쇼크로 사망에 다다르기도 한다지요.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흉측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중국 근대시기의 아편굴 모습@이동순

중독자에게 헤로인 공급이 중지된 상태로 한참 시간이 흘러 나타나는 금단증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공급이 6시간 정도 중단되었을 경우 처음으로 찾아오는 느낌은 불쾌감입니다. 괴로움으로 찡그리게 되겠지요. 과민, 불면, 불안, 눈물, 콧물이 저절로 흐르는 증상마저 나타납니다. 12시간 경과하게 되면 동공이 확대되고, 몹시 한기를 느끼며 온몸을 벌벌 떨게 됩니다. 연속으로 수반되는 증상으로는 근육통, 복통, 식욕감퇴, 피부에 소름이 돋고 몸이 떨리는 경련현상이 발생합니다. 24시간이 경과하면 갑자기 체온이 오르며, 호흡수가 늘고 혈압과 맥박도 상승합니다. 이어서 장 경련과 근육경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구토, 설사 등의 증상이 한 주일 정도 지속되어 완전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빠집니다. 모든 마약중독자들의 금단증은 대체로 이런 과정들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약에 대한 극심한 갈망은 보통 수 주일에서 수 개월간 지속되는데 이 고비를 악전고투로 극복해내기만 한다면 다시 재생의 길을 갈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실패하고 종전처럼 다시 마약에 빠져들게 되지요.

탁성록은 일제말의 그 엄혹한 시기를 이러한 만성적 아편중독에 빠져서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저주의 노래, 죽음의 노래였던 ‘어두운 세상’을 너무 심취했고, 또 취입까지 했던 후과(後果)였을까요? 노래의 나쁜 기운이 그의 삶 전체를 후려쳐버린 것으로 느껴집니다.

 

4. 탁성록, 군악대장이 되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온 세상이 조선민족해방을 외치며 감격을 구가하는 시기에 탁성록은 오랜 기간의 아편중독증에서 조금씩 벗어나보려는 자기변화의 몸부림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극심한 금단증을 이겨가며 재활의 몸부림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효과를 나타내고 여러 가지 정황이 나아지자 오래도록 방치했던 기타를 비롯한 악기들을 꺼내어 모처럼 조율을 하며 연주를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과 생기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니 그 자체가 크나큰 변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전의 동료 후배 연주자들과도 자주 교류를 가지며 작지만 소박한 악단까지 꾸려서 대중들 앞에 나아가 연주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해방정국에 부합되는 활동에 대한 욕구도 생겨났습니다. 말하자면 삶의 활력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가 꾸린 조직의 이름은 ‘탁성록경음악단’. 탁성록은 1946년 이 악단을 이끌고 진주 등지에서 콩쿨대회가 열릴 때마다 출연하여 연주와 심사를 겸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자료에 의하면 1946년 1월 20일부터 이틀 동안, 경남 진주의 동명극장(일제 때의 명칭 ‘삼포관’)에서 진주영사기술자동맹이 개최한 남선(南鮮) 남녀 콩쿨대회의 심사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무렵 탁성록에게 뜻밖에도 놀라운 제의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1945년 조선해안경비대의 군악대를 새로 조직해서 이끌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주 출신의 항해사 윤지창이 손원일과 협력하여 조선해안경비대의 책임적 일꾼으로 일을 돌보게 되었는데, 군악대 조직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윤지창은 먼저 고향 후배인 작곡가 탁성록을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탁성록은 자신이 꾸렸던 경음악단 멤버들을 이끌고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로 특채되어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해안경비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으로 1945년 11월 창설된 해방병단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 후계 조직입니다. 조선경비대 예하에 있었던 해상 전력이지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해군이 창설되면서 그대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이 조직이 한반도의 도서지역과 해안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탁성록은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 창설에 참여한 경력을 바탕으로 이후 국방경비대 장교로 특채가 되었고, 군악대장으로 승진하여 활동을 하다가 이어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로까지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1930년대 중후반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곡가 중에서 전혀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조직에서 소외되었던 탁성록이 만성적 아편중독자로 거의 폐인처럼 살다가 다시 재활의 기회를 얻어서 이처럼 완전한 신분상승으로 새로운 인물이 되어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격변기에 일어나는 여러 일들은 참으로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인간 탁성록이 그냥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장으로 계속 남아 아무런 군사적 권한 없이 오로지 군악 관련 업무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신분상승이 계기가 되어 이후 탁성록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악마로 돌변하여 엄청나게 많은 동족을 살상하는 잔혹한 야수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5. 악마의 길을 선택한 탁성록

지금부터는 탁성록이 어떤 악마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4.3 진상조사보고서와 각종 기록에서 탁성록 관련 자료들을 두루 살펴보고자 합니다.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 창설과 군악대장을 지낸 경력으로 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되었고, 이후 악명 높은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가 되어서 제주도로 파견되었습니다.

제주에서 9연대 정보참모로 악명 높던 시절의 탁성록@이동순
제주 계엄군 9연대 정보참모였던 탁성록과 그의 동료들@이동순

이때 탁성록의 나이는 불과 30대 후반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현장으로 들어가서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당시 9연대 정보참모는 악명 높던 진압책임자 송요찬의 직속으로 실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핵심적 요직이었다고 합니다. 원성이 자자했던 제주도 파견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조직과 구성을 보면 알만한 이름들이 많습니다. 연대장 송요찬, 부연대장 서종철, 인사주임 최세인, 정보주임 탁성록, 작전주임 한영주, 군수주임 김정무, 헌병대장 송효순 등입니다. 송요찬의 이 참모들이 합세하여 경쟁적으로 저지른 악행은 서북청년단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강한 권력의 실세가 된 탁성록은 세상에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호령만 하면 즉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며 애걸했습니다. 불순분자로 지목하면 그 가족들이 돈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울며 애원했습니다. 당시 탁성록을 가까이에서 겪으며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증언1 :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윤태준

연대 정보참모가 탁성록인데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다 죽었습니다. 그 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증언2 : 총무과 직원 최길두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으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그는 제주도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마음대로 가진 악마였습니다.

증언3 : 제주도립 제주의원 경리주임 하두용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와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재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의 팔은 이미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많이 피부가 굳어 있었습니다. 지독한 아편쟁이였지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약기운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증언4 : 의사 장시영

내가 오창흔 씨와 함께 부산에서 소아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을 때, 탁성록이 자주 오창흔 씨를 찾아와 아편주사 놓아주기를 요구했지요.

증언5 : 9연대 군수참모 김정무

수감자 중에 얼굴이 하얀 사람이 눈에 띄는 게 아닙니까? 이상하다 싶어 물어 보았지요. 오창흔이라는 의사였는데 그가 하는 말인 즉, '탁성록 연대 정보참모가 아편주사를 놓아달라기에 거절했더니 나를 잡아넣었다'는 겁니다. 나도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월남해 군대에 들어온 사람이지만 이런 놈은 결코 가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총을 뽑아들고 대뜸 탁성록을 찾아가 '야, 너 왜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드느냐. 이 따위 짓을 해대면 바로 죽여버리겠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오창흔 씨를 석방시켰습니다.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이 어떻게 특채가 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그놈은 이런 저런 구실을 앞세워 얼굴이 반반한 제주여자들을 골라 못된 강간이나 성폭행을 참 많이도 했어요.

 

6. 제주 4.3 시기 가장 무서웠던 저승차사 탁성록

이상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탁성록은 해방 직후 끊었던 아편을 국방경비대 장교로 특채가 되기 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제주도민에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막강한 권력을 폭력적으로 남용하여 무수한 양민들이 탁성록이라는 못된 악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살인적 악행이 모두 마약중독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편을 맞아서 기분이 몹시 고양되어 있을 때에는 주로 눈에 띠는 젊은 여성을 마음대로 끌어다가 강간을 했습니다. 반대로 아편의 약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 몰려오는 불안감, 불쾌감을 억제하지 못하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제주도민들을 마구 총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무렵 악마 탁성록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어떤 불길한 저주의 기운, 죽음의 기운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토록 심취하고 몰입해서 번안가요까지 만들었던 ‘글루미 선데이’, 즉 ‘어두운 세상’의 귀기(鬼氣)와 살기(殺氣)를 느끼게 됩니다. 등골이 오싹해져 옵니다. ‘글루미 선데이’ 한 곡의 출현으로 다수의 사람이 죽음으로 떨어져버렸는데, 식민지 조선의 한 대중음악인이 또 이 노래에 깊이 빠져서 불길한 죽음과 저주의 기운으로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타인의 많은 목숨을 죽음터로 휘몰아 넣은 것입니다.

제주도 4.3사건 진압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송요찬. 이후 육군중장,장관 등을 지냈다@이동순

이러한 과정에서 살인마 탁성록의 잔혹성, 간교성, 타락성이 아편중독으로 말미암아 한층 불타는 기세로 확장된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마다 4월이면 우리는 제주도에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간 너무도 원통한 혼령들이 떠오릅니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을 갖고 제주도에 파견된 북한의 관서 관북 지역, 즉 서청(西靑) 출신 반공청년단원들은 제주도민에게 반인간적/반역사적인 폭력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서청의 잔혹한 활동을 뒤에서 공공연히 보장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 투입된 유격대 진압 이외에도 사적인 이해와 원한 혹은 재산약탈을 위해 주민들을 마구 학살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 살인마 탁성록의 악행은 서청 일당들이 저지른 어떤 악행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49년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탁성록의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밤중에 그에게 호명되어 나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탁성록이 만약 수용소 천막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두 손바닥을 모아 싹싹 빌었습니다. 이 무렵 탁성록은 완전히 이성을 마비된 저승차사였습니다. 그가 누군가를 지목해 발길질을 하면 그것은 그의 목숨이 오늘로 끝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탁성록의 부하들은 즉시 해당인물을 끌고 나가서 총살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총소리가 들리면 그걸로 끝이었지요. 아침 점호를 위해 천막 앞에 줄지어 서면 수용소 부근 무덤 앞엔 피에 젖은 새로운 시신이 또 나뒹굴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체포돼 처형을 앞두고 있는 주민들@이동순
1948년 4.3사건 과정에서 체포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민들@이동순

1948년 11월 어느 날, 제주도 유지의 아내와 딸들이 굴비처럼 포승줄로 묶여서 헌병대로 끌려 들어왔습니다. 대개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탁성록은 맹목적 분노에 차서 그들 대부분을 처형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제 때 제주도 출신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 강상유의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얼굴이 예뻤는데, 탁성록이 자신의 숙소로 끌고 가서 여러 차례 강간한 뒤 직접 총살했다고 합니다. 탁성록과 관련한 여러 증언들의 공통된 점은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서 죽였다’거나 혹은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탁성록은 1948년 6월부터 12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 제주도에 머물렀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제주도민에 대한 즉결총살, 혹은 산 채로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水葬) 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혹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제주도민들이 4.3을 겪은 뒤 격동기의 가장 흉포한 세 악당을 손꼽았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탁성록입니다. 서북청년단 단장 김재능, 계엄군 제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 대위,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지난 2013년, 제주도 4.3을 다룬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제목은 ‘지슬’인데요. 이 영화에는 살인마 탁성록을 모델로 한 ‘마약쟁이 김 상사’가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김 상사는 시종일관 칼을 갈며 주민들을 난도질하고, 마을 여성 ‘순덕이’를 사로잡아 칼로 위협하고 겁탈하는 잔인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탁성록의 제주 시절 궤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7. 노래에 숨어든 저주와 죽음의 기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제주도에서 그렇게 많은 주민을 학살한 살인마 탁성록이 1941년 가요 ‘제주도 아가씨’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 작곡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필 제주도 테마 노래였을까요?

탁성록이 작곡한 '제주도 아가씨' @이동순

동백꽃 피는 달빛에 잠든 섬

물결에 자라난 제주도 아가씨들

뒷모양 긴 댕기 초록치마에 콧노래 부르면

고깃배 돛 우에 물새가 우네

 

동백꽃 피는 안개에 잠든 섬

물결에 떠도는 제주도 아가씨들

업수건 옥색 깃 분홍저고리 섬 속의 긴긴 밤

달 아래 모여서 그물을 짜네

 

동백꽃 피는 노래에 잠든 섬

물결에 깃들인 제주도 아가씨들

저우새 저 멀리 시집간다면

뱃머리 붙잡고 상산과 이별을 섧다고 우네

-‘제주 아가씨’(부평초 작사, 탁성록 작곡, 남일연 노래) 전문

맑고 고요한 제주의 바다 물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제주아가씨의 순결한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노래를 작곡할 때 탁성록의 마음속은 과연 어떤 정서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일까요? 노랫말을 만든 부평초는 시인 유도순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지 불과 7년 뒤 탁성록은 살인마로 변신하여 제주도로 들어와 마구 주민들을 무 베듯 도륙하고 제주도 뭇 여성들을 강간하며 반인륜적 죄악을 수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1941년 가요 ‘제주 아가씨’를 작곡한 탁성록과 1948년 토벌대로 제주에 들어가 마구 주민들을 도륙했던 육군 대위 탁성록 등 두 탁성록의 현저한 거리와 위상의 차이를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인지요? 단지 ‘야누스’, 혹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양면성만으로 단순하게 풀이할 수 없는 기묘한 악마적 곡절이 분명 숨어있는 것만 같습니다. 분명히 ‘어두운 세상’에 서린 죽음의 기운, 저주의 기운이 광란을 부린 효과나 작용은 아닐까 합니다.

 

8. 진주 양민학살사건의 기획자 탁성록

희대의 살인마 탁성록은 전혀 반성을 하지 않은 채 피에 젖은 손을 씻을 틈도 없이 제주 생활을 마치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승진하여 1950년 자신의 고향인 진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시 탁성록의 신분은 육군 CIC 특무대장이라는 막강한 지위와 권력자였지요. 말하자면 금의환향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진주에서도 제주시절 못지않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탁성록은 진주에 도착해서 맨 먼저 보도연맹원에 대한 공포의 학살극을 기획합니다. 1950년 7월15일경부터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돌연 진주경찰서 유치장과 진주형무소로 끌려가 분산 수감됩니다. 이들은 진주가 인민군에게 곧 함락되기 직전인 7월21일부터 7월26일까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 등지에서 모조리 학살되었습니다.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약 2천 명 가량으로 추정합니다. 이 천인공노할 학살극의 가장 핵심적인 주범은 물론 진주 특무대장 탁성록 소령입니다. 여섯 달 동안 제주에서 양민학살을 충분히 시험한 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이 살인마는 더욱 잔혹한 저승차사로 돌변한 것입니다.

탁성록의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진주시가 운영하는 ‘논개사이버박물관’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작사하고 작곡까지 겸했던 노래 하나를 불과 얼마 전까지도 버젓이 사이버 게시판에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논개의 노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처사인가를 누군가가 진주시 당국에 항의해서 뒤늦게 이 노래가 삭제되었지요. 참으로 기이한 것은 이 살인마의 손과 머리로 논개의 우국충정을 다룬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코믹한 사실입니다. 누가 이 살인마에게 논개 노래의 제작을 위촉했던 것인지 자못 소름이 끼칩니다.

탁성록이 작곡을 맡은 '논개의 노래'@이동순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데

가야금 줄에 하소하던 논개의 죽은 넋이

칠백 리 남강 물결 속에 목메어 우는 듯

촉석루 무슨 말 할 듯 야속해 웁니다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 듯

허물어진 서장대 달빛만 밝게 비치네

칠백 리 남강 물결 위에 그림자 지우며

천만 년 풀지 못한 설움에 젖었네

-‘논개의 노래’(탁성록 작사, 작곡) 전문

단지 얄팍하기만 한 표피적 감성으로 분칠되고 덧씌워진 이 노래의 작사 작곡이 동족을 무수히 학살했던 아편중독자이자 살인마였던 탁성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습니다. 완벽한 자의식 상실, 반역사적인 위선과 철저한 무감각, 무분별 속에서 이 노래가 제작되었으니 진주시민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이 노래를 하필이면 희대의 살인마에게 제작을 위촉했던 당시 몰지각한 관계자들에게 그 준엄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인마 탁성록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진주 특무대장 시절을 끝으로 어떤 부정과 부조리사건의 주모자로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도 떠오르고, 자신이 뿌린 죄악의 씨를 그대로 거둔다는 말도 떠오릅니다. 아무튼 살인마 탁성록은 그 일로 강제전역을 당한 뒤 세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살인마의 후일담(後日譚)을 전해주는 이가 없습니다. 제대로 혼인을 한 적 없으니 가족인들 따로 있었을 리 없고, 어디를 찾아간들 그를 인간으로 여기는 이가 없었을 터이니 짐작컨대 어딘가에 숨어서 살인마가 그토록 즐기던 아편이나 실컷 맞다가 돈도 떨어지고 처량한 알거지 신세로 떠돌다 이승의 비루한 삶을 마감한 것이 아닐까 상상을 떠올려 봅니다.

노래 한 곡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한다는 말에 이제는 실감을 하시는지요. ‘글루미 선데이’, 즉 번안가요 ‘어두운 세상’의 부정적이고도 음울한 효과가 얼마나 민족사에 깊고 흉한 상처를 남겼는지 우리는 이제야 조금 알 것만 같습니다. 희대의 살인마 탁성록은 결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매망량(魑魅魍魎)과 같은 목숨이었습니다. 인간성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채 다만 흉한 마약에 의지하며 자신의 악마적 역량을 키워나간 탁성록!

역사적 분별과 정당성을 잃었던 부도덕한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탁성록이라는 독버섯은 인간의 세상에서 자신의 불칼을 마음껏 휘두르고 인명을 도륙하다가 한 순간 덧없는 재로 사라지고 말았군요. 굴곡 많았던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이 탁성록과 비슷한 악마의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악마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늘 우리 주변을 관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주와 진주에서 악마 탁성록으로 말미암아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영령들께 깊은 위로를 드리며 한 줄기 향불을 피워 조화(弔花)를 바칩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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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dslee5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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