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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소소익선’ 전법[김부복의 고구려POWER 38]
김부복 | 승인 2020.03.18 19:43

[논객칼럼=김부복]

잘 알려진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를 돌이켜보자.

한나라 임금 유방이 어느 날, 신하인 한신과 얘기를 하다가 불쑥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신이 말했다.

“임금께서는 10만쯤 거느릴 수 있는 장수입니다”

유방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는가”

한신이 대답했다.

“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유방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10만밖에 거느릴 수 없는 내 밑에 있는가”

한신이 또 대답했다.

“임금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아니라, 장수를 거느리는 장수입니다. 그래서 내가 임금의 밑에 있는 것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우쭐했다. 한신은 어쩌면 윗사람의 기분을 흐뭇하게 만드는 ‘달인’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큰소리를 치기 전에 생각해볼 게 있었다. ‘전쟁비용’이다.

‘손자병법’은 전쟁으로 소요되는 비용과 무기, 자재 등을 합치면 ‘하루에 1000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10만을 거병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다익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신은 거두절미하고 ‘다다익선’이었다.

어쨌거나, 역대 중국의 적지 않은 ‘황제’가 ‘다다익선’을 과시했다. 한신의 아첨을 들은 유방 자신도 30만 대군을 이끌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선비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 대군이 되레 포위를 당했고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황제’의 출정은 항상 요란했다. 전∙후∙좌∙우와 중앙 등 ‘5위(衛)’ 거느렸다. ‘5위’를 갖추는 데에만 최소 4만의 정병과 보충부대를 합쳐 10만 병력이 필요했다. 여기에다 의장대까지 따르도록 했다. 그 규모가 간단할 수가 없었다.

‘다다익선’을 가장 즐긴 황제는 수나라 양제일 것이다. 알다시피 양제는 자그마치 113만3800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 군사의 행렬이 자그마치 960리에 뻗쳤다고 했다. 서울과 부산 거리였다. 군량과 무기 등을 수송하는 수송병이 그 갑절이었다고 했으니 무려 300만 명이었다. 세계 전쟁사상 그렇게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은 양제가 처음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호위군사의 행렬이 ‘별도로 80리’였다. 그래야 황제의 ‘권위’가 설 것이었다. 합치면 1000리가 넘었다. 고구려 따위는 군홧발로 짓밟아도 점령할 기세였다.

물론 양제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적의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병법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의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지형도 험준했다. 자칭 ‘병법 전문가’인 양제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양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병법을 좀 익혔어야 좋았을 뻔했다.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경우가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러고도 패배한 기록 또한 한 차례도 없었다.

픽사베이

광개토대왕이 ‘폼’을 잡지 못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군사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광개토대왕이 거느린 병력은 ‘소수 정예’였다. 수나라 양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이를테면 ‘소소익선(少少益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이듬해에 백제를 공격, 석현(石峴) 등 10여 개 성을 빼앗았다. 백제 개로왕은 광개토대왕의 병법이 무섭다는 얘기를 듣고 나아가서 싸울 용기도 내지 못했다. 이때 동원한 병력은 고작 4만 명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군 8000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둘 때도 이끌고 나간 군사는 7000명에 불과했다.

백제의 군사력은 간단치 않았다. 광개토대왕 당시는 아니었지만 백제는 대륙의 요서 지방에 광활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요서백제’다.

중국은 백제의 이 식민지가 껄끄러웠다. 백제를 몰아내려고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여러 차례나 공격했다. 하지만 참패만 거듭하고 말았다. 결국 백제 임금을 동청주자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 현재의 ‘산둥반도’까지 백제에게 내주고 만 것이다. 이렇게 ‘막강한 백제’였다. 광개토대왕은 그 백제를 불과 4만의 군사로 굴복시킨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재위 8년(398), 숙신을 공략해서 남녀 300명을 포로로 잡아왔을 때 동원한 것은 불과 ‘한 무리의 군사’였다. 숙신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여 고구려를 섬기겠다”고 했다.

명령 하나로 ‘수천’ 기병을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했어도 군대의 이동과 그에 따르는 군수물자의 수송은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아득한 거란까지 수만 리를 원정하면서도 병사들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았다. 말을 타고 며칠을 달리면서도 사기가 넘쳤다. 패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대군이 아닌 정예병이기 때문에 기습작전도 수시로 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면 당연히 군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백성은 거기에 정비례해서 고달파질 수 있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백성이 가난해지면 나라에 대한 반감이 생기고, 도둑이 들끓게 된다고 했다. 그 틈을 노려 적이 공격해올 경우 그 나라는 반드시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수나라가 그랬다.

옛말에, 3년 동안 농사를 지었으면 반드시 1년분의 축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9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면 반드시 3년분의 축적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 나라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또, 9년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하지 못하면 ‘부족(不足)’하다고 했고, 6년 양식을 비축하지 못하면 ‘급(急)’하다고 했다. 1년 양식도 비축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립기반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소수의 정예 병력만 이끌고 출정했기 때문에 백성의 동요도 없었다. 수나라 양제 때 민심이 흔들렸던 것과는 달랐다. 백성은 광개토대왕이 전쟁터로 출정했는지 제대로 알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왕자 시절 임금을 도와서 9년, 재위 21년 모두 30년 동안 전쟁터에서 보냈어도 국력을 허비하는 일이 없었다. 고구려가 후대인 장수왕 이후 200년 이상 ‘최강국’으로 군림할 있었던 게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기록한 문헌은 없다. 병법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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