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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정준기의 시사 톱아보기]
정준기 | 승인 2020.03.23 09:05

[청년칼럼=정준기]

사랑(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정승재 뇌과학자라면 “아마 당신의 뇌가 ‘시상하부’를 활성화한다”라고 말할 겁니다.

시상하부는 우리가 수렵 채집을 하던 때부터 ‘무리 짓기’와 ‘구별 짓기’를 관장하는 영역입니다. 무리 짓기는 내집단(내 편)을 뜻하고, 구별 짓기는 외집단(남의 편)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상하부를 통해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상하부 활성화로 ‘편 가르기’가 시작되면 이어 ‘뇌섬’과 ‘조가비핵’이 작동합니다. 이 두 기관은 역겨움과 고통, 쾌락과 행복 등의 감정을 관장합니다. 뇌섬과 조가비핵 작동으로 우리는 내집단에는 ‘사랑스러움’을, 외집단에는 ‘두려움·불안함’을 느낍니다. 또 이때 뇌는 전두엽의 활성도를 낮춰서 이성적 판단과 논리적 이해를 방해합니다.

자 이제 끝났습니다. 사랑(혹은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 뇌는 시상하부에서 편 가르기를 시작하고, 뇌섬과 조가비핵에서 사랑 혹은 혐오 감정을 느끼며, 전두엽 작동을 줄여 이성의 비중을 낮추고 감정의 영향력을 높입니다. 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혹은 미워)할 수 있게 됩니다.

픽사베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흔히 반대 관계로 이해하는 사랑과 혐오의 감정이 실은 뇌의 한 회로에서 처리되는, 붙어 있는 감정이란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방식’ 그대로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당신은 지금껏 사랑에 빠졌던 만큼이나 누군가를 혐오하곤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혐오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혐오를 쉽게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혐오 연구의 대가인 폴 로진(Paul Rozin)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혐오를 “어떤 대상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더럽힌다는 느낌”과 이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배설물, 시체, 썩은 고기 등 직관적 반응을 유발하는 오염원을 보고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혐오 감정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오염원과 일정한 거리(경계선)를 지키기 위해 발현한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더는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시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21세기 현대문명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우리는 혐오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 해답을 미국 시카고대학교 법학 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에게 찾을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우리들의 혐오를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projective) 혐오’로 구분한 다음 “현대사회가 배설물 등에 대한 ‘원초적 혐오’가 아닌 소수집단에 대한 ‘투사적 혐오’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단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 명백한 오염물에만 반응하던 혐오 감정을 흑인·여성·성 소수자 등 소수집단에 대한 투사적 혐오로 확장한다고 누스바움은 지적합니다.

이제 ‘혐오’라는 감정의 정체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혐오 감정은 오래전부터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였습니다. 우리는 혐오를 통해 외부의 오염 물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공중 보건이 발달하고 개인위생이 향상하면서 명백한 외부의 오염 물질은 차츰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앞서 다뤘듯이 혐오는 사랑과 같은 감정 회로를 통해 발현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쉽게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는 우리는 혐오 감정을 명백한 오염물질이 아닌, 흑인·여성·성 소수자에게 투사하기 시작합니다.

“흑인은 지능이 낮아 백인보다 열등하다”

“여성은 고등교육을 이해할 수 없다”

“성 소수자는 더럽고 위험한 존재다”

이 투사적 혐오의 결과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피부색으로 우열을 나눌 수 없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성 소수자는 더럽지도 위험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처럼 혐오는 ‘경계선을 강화하는 감정’입니다. 전두엽의 통제를 벗어나는 혐오 감정을 합리적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된 사랑에 끙끙 앓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똑같은 회로에서 발현한 이 서로 다른 두 감정으로 인해 지금껏 싸움과 화해, 그리고 다툼과 협력을 반복해왔습니다.

혐오는 우리를 ‘보편’에서 ‘파편’으로 잘게 부수지만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시민이자 공동체로 묶어줍니다. 혐오와 사랑, 나는 사랑을 택하렵니다.

 정준기

 내 글에 취하지 않으려 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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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  qkslvk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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