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논객칼럼=서석화]                

“당신들은... 죽을 만큼 서로 사랑했거나,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거나...”

픽사베이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쳐다볼 때는 숨도 안 쉬는 듯 얕은 미동도 없던 그녀가, 그래서 내 말에 받은 충격이 너무 컸나를 걱정하게 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한참을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당겼다 밀었다 하더니 소리 내어 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괜한 말을 했다는 자책이 그녀의 눈빛에 가려졌다.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고 안정돼 보이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맞받았다. 나로선 절대 쉽지 않은, 몇 번의 호흡을 끌어다 한데 모아야 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전 생애를 건 사랑에 대한 간섭을 저질렀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그거 모르지 않았다. 앞의 말만 들으면 그녀는 역사에 남을 절세의 사랑을 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뒤의 말은 그녀가 믿어 왔고 믿고 싶은 것 전부가 부정된 혹독한 말이다. 당연히 비련의 주인공으로 그녀를 서게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용기를 냈다. 그녀를 살리는 일이 될지, 그녀를 죽이는 일이 될지 사실 겁은 났다. 하지만 화가 났다. 이별 후에도 현재의 사랑으로 싸안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신비해서! 이제는 완벽한 남남이라며 곁눈질로도 봐주지 않는 그녀의 남자에게 화가 나서! 그런 남자를 자기들이 사랑했던 기억만으로 품고 기다리는 여자가 불쌍해서! 그런데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가 대책 없어서! 대책 없는 나에게 와서 자신의 사랑을 매번 확인 받고 싶어 하는 그녀가 더 대책 없어서! 아니, 아니다. 이제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수 년째 그녀에게 휘둘려온 그 ‘사랑’이란 것에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거 탈탈 털어내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오래전 내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단편 습작을 보내온 사람이었다. 자신의 실제 이야기라는 한 줄의 설명이 소설 말미에 붙어 있었다. 흔한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주인공 여자로 인해 그 소설은 흔한 주제였지만 흔해지지 않았고, 따라서 볼품없는 습작이었지만 빛날 수 있었다. 나는 엽서로 답변의 말을 전했다. 자존심은 1도 세우지 않는 소설 속 여자에게서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는 자존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설이지만 그랬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었다.

픽사베이

오늘 오 개월 만에 근처에 왔다는 그녀와 만났다. 그녀는 역시 한 시간이 넘도록 똑같은 말을 또 되풀이했다.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는 지금 우리가 흔해빠진 남들처럼 흔해빠진 이별을 했다는 게,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제가 헤어지자고 말한 거 자체가 그는 용서가 안 되는 거죠. 저 그거 이해돼요. 그는 지금 제게 화나 있는 거예요. 화가 나 있기 때문에 제가 미운 거고 아직 돌아오기가 싫은 걸 거예요. 그래서 기다려요. 전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믿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당신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별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이 사랑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그 사람도 당신도 서로에겐 이미 지나간 사람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시간을 사는 것 아닌가? 당신이 현재로 붙잡고 있는 게 그 사람에겐 과거라는 거, 정말 모르냐는 말이 가슴을 긁는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그에게 타인 중에서도 가장 먼 타인일지 모른다는 말도 목젖을 누른다. 삼켜지는 말 위에서 풀쩍풀쩍 뛰고 있는 다음 말들이 튀어나올 준비를 마친 채 숨을 고르고 있다. 답답했다. 대책 없는 그녀의 ‘마음’에 짜증이 나면서도, 그 대책 없음을 사랑한 내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지르듯이 한 말이었다.

그녀가 일어서지 않았다면 분명 다음 말이 이어졌을 것이다. 사방으로 흩어져 쓸려가는 폐지 더미 같은 그녀의 숨소리를 위태로운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저리 밀던 의자를 바로 세워 등받이에 두 손을 모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눈은 이미 자욱한 물기에 젖어 울 것 같은데 목소리는 곧은 계단처럼 절도 있었다. 안쓰러움과 안심이 동시에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래, 그게 맞겠네. 그러면 설명이 되네요. 처음부터 그 사람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왜 한 번도 못했을까요? 그는 제가 이별을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성큼 수락했어요. 그리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어요. 사랑했다면 저도 이별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도와줄 수도 있을 텐데... 사랑했다면 이런 제가 안쓰러울 수도 있을 텐데... 저라면 그럴 것 같은데... 더 오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저여서 다행이네요."

픽사베이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우왕좌왕 서성대는 그녀를 두고 나오며 미처 못한 말을 전했을 뿐이다.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었으나, 나로선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슬픈 가정이었다.

“사랑이었다 해도 헤어졌고, 그래서 그는 완전히 끝났고...”

한쪽이 아무리 잡고 있어도, 한쪽이 아무리 너를 ‘우리’라고 우겨도, 이별은 헤어진 게 맞다!

 

 서석화

  시인, 소설가 /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회원/한국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 <종이 슬리퍼>/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이별과 이별할 때>/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전 2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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