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모든 인간 관계는 나와 당신을 실망시킵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 뒤에는 이기심이라는 음험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식의 비관주의나 성악설을 펼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휴대폰 속 수많은 인맥들이 생각보다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다소 비관적으로 보이나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저의 믿음은 제가 ‘자발적 자가고립의 시대’에, 의외로 잘 지내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먼저 제 얘기를 좀 해야겠군요. 자타가 공히 인정하는 바, 저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부모님의 돌봄을 못 받은 것도 아니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군대 전역 후 성격을 ‘사교 모드’로 전환하기 전까진 무리에 끼지 못하고 겉돌았던 시간들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왕따’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정도의 겉돎이었습니다. 나란 인간은 그냥 이렇게 생겨 먹었구나, 되도록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에 쫓기듯 사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저 역시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데 제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십대 초반부터 각종 동호회와 모임에 나가고, 대학 봉사 동아리에 들어가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죠.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일련의 시도들이 아예 무의미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메신저 친구창은 하루가 다르게 길어졌고, 일주일 내내 약속이 없던 적이 언제였나 기억해 내기가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혼자의 시간은 끝났구나. 섣불리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픽사베이

다들 그런 적 있지 않나요? 어느 날, 어느 새벽. 쇳물처럼 끌탕 치는 가슴 속 무언가를 견디기 힘들어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던 적. 전화를 걸 상대를 찾아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하염없이 내려본 적.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날, 꽉꽉 찬 옷장에 입을 옷이 없듯 결국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놔 본 적. 저 역시 수많은 밤들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물론 씁쓸했지만, 한편으론 놀라운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무수한 인간 관계 속에서도 저는 여전히 혼자였던 것이죠. 더 이상 외롭고 싶지 않아 섞여 들어간 사람들 틈에서도 여전히 혼자라고 느낀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고민이 깊어질 무렵, 코로나19 창궐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전사회적으로 실시됐습니다. 재채기를 할 땐 소매로 입을 가린다는 위생 지침부터, 종교 예배 같은 단체 행사를 제한한다는 행정 권고까지 광범위했죠. 자연스레 사람들 간 만남은 줄었고, 피치 못할 약속이 없는 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풍경이 보편적이어 졌습니다. 가뜩이나 외로움 많이 타는 제게 크나큰 위기가 찾아온 거죠.

헌데 이상했습니다. 모든 약속을 최소화하고 집안에 ‘셀프 유폐’된지 한달을 넘어가는 지금, 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딱히 평소보다 우울해지지도, 무력감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우울감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주위 ‘인싸’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죠. 이유가 뭘까. 제가 찾은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바로 ‘혼자의 시간을 견디는 힘을 길러온 결과’였던 겁니다.

저의 주된 취미는 독서와 운동(특히 달리기)입니다. 전자는 글자를 읽을 줄 알기 시작할 때부터 끊이지 않았으니 20여년 차고, 후자도 스무살 이후부턴 주 4회 이상 꾸준히 지속해 왔습니다. 대단히 건설적이고 건전해 보이는 이 취미들을 긴 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던 데에는 사실 꽤 서글픈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외롭고 싶지 않다’는 절실한 마음이 바로 그것이죠. 혼자임을 못 견뎌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저였으나, 삶은 혼자라고 느끼는 날들 역시 덩달아 늘어갔습니다. 새벽에 순대국밥에 소주 한잔 하려해도 친구가 필요했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뭣 같았는지 징징거릴래도 누군가가 필요했죠. 타인의 공감과 소통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감정들이 친구와 약속잡듯 계획하에 방문하진 않으므로, 정작 필요할 때 사람들은 내 곁에 없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잦아졌습니다.

하지만 독서와 달리기는 제가 할 수 있는 행위 중 유일하게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그저 책가방속에 넣고 다니던 책을 펴 읽고, 불면증에 뒤척이다가도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뛰쳐나가면 그만이었죠. 조금만 익숙해지면 구멍 뚫린 쌀봉지처럼 시간이 ‘순삭’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독서와 달리기를 통해 ‘혼자 나쁘지 않게 즐기는 법’을 익혀온 셈이죠. 이는 제가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고립에도 꽤 괜찮게 지낼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아, 물론 아주 괜찮다는 건 아닙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아, 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만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르친 건 뭘까요. 누군가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든, 온갖 이유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요. 세달전만 해도 코로나19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좁다란 방안에 나 홀로 남겨지게 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됐죠. 이제 사람들은 혼자가 됐습니다. ‘나’라는, 친하지만 어딘가는 또 어색한 친구와 엄청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달까요. 저는 이 일련의 상황이 코로나19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부상과 질병, 퇴사,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 등 생각도 못한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언제든 혼자라는 독방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평소 죽고 못 살던 수많은 친구들도 그때만은 우리에게 맞닿을 수 없는 엄연한 타자로 물러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혼자를 기릅시다. 색칠공부든 달리기든 넷플릭스 정주행이든 상관 없습니다. ‘혼자인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그렇다고 주변 인연 다 접어두고 아웃사이더로 거듭나자는 말은 아닙니다. 전염병이 물러가고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 것이고, 또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합니다. 다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지는 말자는 뜻입니다. 대인관계 스킬을 기르는데 쓰는 신경의 반 정도라도,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익히는데 투자하자는 거죠. 코로나19가 가르쳤듯 우리는, 언제든 온갖 이유로 혼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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