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논객칼럼=김희태]

태봉산에 방치되고 있는 숙종의 장태 석물, 수습과 보존에 힘써야

충남 공주시의 지명 가운데 눈에 띄는 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태봉동(胎封洞)이다. 태봉동은 태봉산(胎封山)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태봉초등학교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서 태봉(胎封)과 관련한 지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명의 유래가 된 태봉산의 정상에는 공주 숙종대왕 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1호)가 남아 있어, 이곳이 숙종의 태실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숙종(재위 1674~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적장자로, 모처럼 왕비 소생으로 태어난 왕자였다. 혈통은 숙종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소생이라는 것 때문에 혈통적 콤플렉스를 가졌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明陵)@김희태

여기에 현종은 조선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왕이었기에, 현종의 아들은 숙종이 유일했다. 따라서 왕비의 소생이라는 정통성과 이를 기반 삼아 왕권을 강화했던 숙종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바로 환국정치다. 환국(換局)은 조정 내 권력을 상대 당으로 바꾸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정권교체와 비슷하다. 숙종은 환국정치의 과정에서 여인들을 이용했는데, 희빈 장씨의 죽음이나 인현왕후 민씨의 폐서인과 복권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숙종의 태실 흔적이 태봉산 정상에 남아 있다. 현재 공주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태실이다. 그렇다면 숙종의 태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공주에 조성된 것일까?

■ 여러 차례 연기를 거친 뒤 조성된 숙종의 가봉 태실

숙종의 태실과 관련한 기록은 크게 『승정원일기』와 『태봉등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초 숙종이 태어난 뒤 아기씨 태실의 조성 과정이 시작된다. 최초 관상감(觀象監)에서 장태처와 길일을 올리게 되는데, 우선 장태처와 관련한 삼망단자(三望單子, 3배수 추천)를 올리게 된다. 기록에서 확인된 장태처의 후보지는 ▶공주 ▶청주 ▶춘천으로 이 가운데 공주로 낙점이 되었다. 또한 장태처의 낙점 이후 장태와 관련한 길일을 정하고 태실의 잡물 준비와 도로를 닦는 과정을 거쳤다. 안태사인 형조판서 여이재는 태봉산에 도착, 태함을 묻고 봉토(封土)를 한 뒤 사초(莎草) 과정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태실 주변에 표석(標石)을 세우는 순서로 태실의 조성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때가 1661년 12월 25일이다.

숙종의 태실비가 있는 태봉산의 전경@김희태

태봉산의 정상. 가운데 민묘가 들어서 있으며, 숙종의 가봉 태실비와 아기씨 태실비가 세워져 있다@김희태

현재 태봉산 정상에 아기씨 태실비가 남아 있다. 앞면에 ‘순치십팔년팔월십오일묘시생원자아지씨태실(順治十八年八月十五日卯時生元子阿只氏胎室)’이, 뒷면에 ‘순치십팔년십이월이십오일진시입(順治十八年十二月二十五日辰時立)’이 새겨져 있다. 우선 앞면에는 숙종의 출생일과 신분이 새겨져 있다. 순치는 청나라 황제인 세조(=순치제)의 연호. 순치 18년을 환산해보면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에 태어난 원자 아기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뒷면에는 태실비를 세운 날짜를 기록하고 있는데, 12월 25일에 태실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태봉등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숙종의 아기씨 태실비와 가봉 태실비@김희태

아기씨 태실비. 명문을 통해 1661년 12월 25일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이후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전례에 따라 숙종 태실에 대한 가봉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현종과 숙종이 재위하던 당시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으로 대표되는 지독한 흉년으로, 현종과 숙종 태실의 가봉은 계속 미뤄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능이나 태실을 조성하는 것은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으로, 노동력의 징발은 기본적으로 농번기 이후에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흉년이 지속되다 보니 태실의 가봉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실제 현종 태실은 1681년 10월 20일에, 숙종의 태실은 1683년 10월 15일에서야 태실의 가봉이 마무될 수 있었다.

『태봉등록』을 보면 태실을 가봉할 때는 관상감 제조가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당시 부재중이었기에 이조참판 홍만용과 공조참판 심재가 공주로 내려갔다. 홍만용과 심재는 1681년 10월 12일 공주에 도착하고, 15일 묘시(卯時)에 석물을 세우고, 화소(火巢) 구간을 측량해 경계를 확정지었다. 그렇게 태봉산 정상에 숙종의 가봉 태실비와 장태 석물 등이 설치되었다.

가봉 태실비.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 뒷면에 '강희이십이년십월십오일건(康熙二十二年十月十五日建)'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현재 남아 있는 가봉 태실비의 경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 뒷면에 ‘강희이십이년십월십오일건(康熙二十二年十月十五日建)’이 새겨져 있다. 강희(康熙)는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의 연호로, 강희 22년을 환산해보면 1683년(=숙종 9년) 10월 15일에 세운 것이 확인된다. 역시 『태봉등록』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숙종의 태실이 옮겨진 뒤 기존에 있던 태실비와 장태 석물 등은 흩어진 채 태봉산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1991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한 결과 숙종의 태실비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태봉산에 방치되고 있는 숙종의 장태 석물, 수습과 보존에 힘써야

이처럼 태봉산의 정상에 자리한 숙종의 태실비는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나름 존재가 알려져 있다. 때문에 종종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편이다. 그런데 해당 태실비를 찾는 사람들조차 태봉산에 남아 있는 태실 관련 장태 석물이 방치된 채 흩어져 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번 답사에서 중점을 두고 찾고자 했던 것도 바로 장태 석물로, 그 결과 상당수의 석물이 온전하게 잘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숙종의 장태 석물은 크게 3개의 지역에서 확인이 된다. 크게 태봉산의 정상과 밤나무 밭, 골짜기 등이다.해당 석물의 명칭은 『정종대왕태실가봉의궤(正宗大王胎室加封儀軌)』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은 순조 태실. 장태 석물의 형태는 사진과 같다
태봉산 정상에 있는 석물. 위의 사진 속 중앙 태석의 하단에 있는 사방석(四方石)으로 추정된다 @김희태

우선 태봉산의 정상에는 총 2개의 석물이 확인된다. 가봉 태실비 앞에 면전석(面磚石)이 남아 있으며, 아기씨 태실비 옆에 방형의 석물은 태실의 중앙 태석의 하단에 있는 사방석(四方石)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밤나무 밭에서는 주로 우상석(遇裳石), 면상석(面裳石) 등이 확인된다. 잔존 수량만 8개다. 이와 함께 횡죽석(橫竹石)의 파편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골짜기 부근에서는 기단석인 우전석(遇磚石)과 면전석(面磚石)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석물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연엽동자석(蓮葉童子石)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태봉산 곳곳에는 숙종 태실의 장태 석물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으며, 향후 지표조사를 실시할 경우 추가 석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해당 석물은 향후 숙종의 태실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지점이다.

밤나무 밭에 흩어져 있는 석물. 주로 우상석(遇裳石), 면상석(面裳石)이 확인된다 @김희태
골짜기에서 확인되는 석물. 연엽주석과 연엽동자석의 받침돌인 우전석(遇磚石)과 면전석(面磚石)이 주를 이룬다 @김희태
연엽동자석(蓮葉童子石)..전반적으로 석물들의 상태가 좋은 편에 속한다 @김희태

우선 공주시에서 현재 남아있는 숙종의 장태 석물의 수습과 보존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태봉산이 사유지일 경우 소유주와의 협의가 진행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이는 공주시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성주군에서 있었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태종 태실지의 경우 그간 태종 태실의 장태 석물이 묘의 기단으로 쓰이거나 주변에 방치된 채 있었다. 그러던 지난 2015년 성주군에서 소유주와 협의 후 석물을 수습한 뒤 현재 수장고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하루 빨리 시에서 움직여 해당 석물의 망실과 훼손을 피하고, 지표조사를 실시해 추가적인 석물의 존재 역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장태 석물의 수습 및 보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으며, 향후 정상에 있는 태실비와 함께 숙종 태실의 복원 문제 역시 관심을 가지고 검토하길 기대해본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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