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39]

[논객칼럼=김부복] 서기 668년은 ‘치욕의 해’였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의 군사들에게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임금은 항복했어도 백성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단군 이래 3000년이나 만주벌판을 차지했던 백성이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백성은 망할 수 없었다.

특히 안시성의 저항은 대단했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쳐들어왔다가 눈알을 잃고 피눈물을 뿌리며 달아났던 곳이다. 이세민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군주였다며 받들고 있는 임금이다. 그런 이세민을 물리친 안시성 백성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안시성 외에도 만주벌판 곳곳에서 저항의 불길이 타올랐다. 11개의 성이 저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완전히 점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꺾이지 않는 정신은 발해를 건국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고구려가 쓰러지고 나서 불과 31년 만에 ‘제 2의 고구려’인 발해가 만주벌판을 다시 호령한 것이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구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발해의 명장 장문휴(張文休) 장군은 오늘날의 산둥반도 일대인 등주(登州)를 점령, 통쾌한 복수전을 펴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통일신라’에 흡수되고도 그 정신을 잃지 않았다. 신라는 이른바 ‘삼한일통’을 하는 과정에서 모든 제도는 물론이고 복장까지 ‘당나라 스타일’을 따랐다.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을 버렸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표현을 옮기면 “사대주의의 병균”을 퍼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 출신은 달랐다. 나라가 망해서 몸은 비록 신라 땅에 있지만, 고구려의 정신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똘똘 뭉쳐서 옛것을 지켜냈다. 어쩌면 요즘 용어로 ‘보수 꼴통’ 소리를 들을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관직의 이름도 중국과 달랐다.

“큰 성에 욕살(褥薩)을 두는데, 이는 중국의 도독(都督)에 비할 수 있는 벼슬이다. 나머지 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는데, 도사(道使)라고도 하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교할 수 있다. 그 밑에…대모달(大模達)이 있는데, 이는 중국의 위장군(衛將軍)과 같으며 말객(末客)은 중국의 중랑장(中郎將)과 비할 수 있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양만춘을 ‘성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잘못된 표현이다. 양만춘은 ‘성주’가 아니라 ‘처려근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 출신에게는 별명이 붙었다. ‘단골(檀骨)’이다. 신라의 골품제도인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에 빗대서 붙인 별명이다.

단골은 당연히 ‘단군(檀君)’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 눈에는 고구려 출신들의 고집스러운 행동이 ‘단골’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단골이라는 표현에서 ‘단골손님’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다른 얘기도 있다. 옛날에는 무당(巫女)을 ‘당골네’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서 단골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이 생길 때마다 당골네를 찾다보니 자주 찾아다니는 사람을 '당골손님'이라고 표현하게 되었고, 나중에 말이 변해 단골로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유래야 어찌되었든 ‘단골손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변함없고 꾸준한 것이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으면 그리워지기도 하는 게 ‘단골손님’이다.

이 고구려의 풍습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구려의 후손으로 알려진 태국의 ‘라후족’이다.

김장김치 담그는 모습

이들을 만나고 연구한 민족사학자 김병호(金炳豪) 박사는 그들이 김치 담그는 것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마늘과 밥을 으깨서 푸성귀와 함께 버무렸다. 그런 다음 큰 대나무통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소금물을 부었다.…”

김 박사는 그들이 김치를 ‘앗찌’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장아찌’에서 보듯, 우리 선조는 김치를 ‘아찌’라고 했는데 라후족은 지금도 김치를 ‘앗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불렀다. 말의 어순도 중국이나 태국과 달랐다. 우리처럼 ‘주어+목적어+동사’ 순서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수확한 곡식을 ‘부경’이라는 창고에 저장했다. 라후족도 추수한 벼와 옥수수를 ‘부경’과 비슷한 곡식창고에 저장하고 있었다.

씨름을 하는 방식이 우리와 좀 달랐다. 자세히 보니,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씨름 그대로였다.

고구려 때에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았다. 김 박사는 미얀마에서 국수를 파는 라후족 아주머니와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형사취수’가 이어져오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아주머니와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눴다.

-남편이 먼저 죽는 바람에 시동생과 같이 살고 있다.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다니, 말도 안 된다.

-어째서 말도 안 되는가. 코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데?

-시동생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있다.

-그렇다면 코리아 사람들은 짐승이다. 같은 살붙이와 살지 않고 다른 남자와 살다니!

태국 사람들은 라후족을 ‘무수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냥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라후족은 활 솜씨가 뛰어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욱 고구려의 후손이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라후’라는 말은 ‘호랑이를 숭배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호랑이를 좋아하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활을 잘 쏘고, 호랑이를 좋아한다면 라후족은 고구려의 후손일 수밖에 없다.

호랑이를 섬기는 민족이 또 있기는 하다. 중국 운남성의 ‘이족(彛族)’이다.

그렇지만 ‘이족(彛族)’은 원래 ‘이족(夷族)’이었다. 중국 사람이 탄압하면서 한자를 ‘이(彛)’로 고쳐버리는 바람에 ‘이족(彛族)’이 되고 말았다. 그랬으니 ‘이족’은 ‘동이족(東夷族)’인 우리와 같은 핏줄이 아닐 수 없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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