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나의 달빛생각]

[청년칼럼=이루나]

봄이다. 집 앞 중랑천 뚝방길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하늘거리는 벚꽃 잎들의 자태가 아찔하고, 벚꽃 내음도 바람을 타고 너풀너풀 넘어온다. 23층 베란다에서도 단내가 나는 듯하다. 하지만 벚꽃 구경 가는 것이 주저된다. 아버지를 차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서러움처럼, 봄을 오롯이 봄이라고 느낄 수가 없다. 코로나가 앗아간 우리네 봄의 모습이다.

6살 딸은 2개월 넘게 집에 갇혀 있다. 한두 개씩 사 모은 보드게임도 질려서 책장 구석에 쌓여 있다. 밖에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 대지만 먼저 나가자고 조르지는 않는다. 딸아이도 뉴스로 전해 들은 코로나가 무섭단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딸에게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아빠랑 벚꽃 보러 갈까? 자전거 타고?"

대답보다 행동이 빠르다. 딸은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현관을 나서기 전 단단히 마스크를 씌운다. 오랜만에 분홍 자전거를 끌고 1층 입구를 나섰다.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페달을 밟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신나게 큰길로 향하던 자전거의 핸들을 애써 움켜잡았다. 사람이 붐비는 뚝방길로 차마 갈 수가 없다. 고층 아파트 그늘에 가려 벚꽃이 덜 핀 외진 곳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몇 바퀴를 돌더니 딸도 힘에 부친 지 잠시 페달을 멈춘다. 땅에 떨어진 벚꽃 가지를 주워 딸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마스크 너머로 건너온 딸아이의 말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빠. 올해 벚꽃을 처음 만져봐. 벚꽃 잎이 바람에 춤추는 것 같아!"

@이루나

아이의 말은 경험을 먹고 자라난다. 책에서 2차원 사진으로 만나는 벚꽃과 실제 오감으로 느끼는 벚꽃은 다른 차원이다. 코로나가 아이의 봄을 깡그리 앗아갔다는 사실이 그저 슬프다. 딸아이의 6살의 봄은 어떻게 간직될까? 생동감 넘치는 봄이 삭막한 콘크리트 집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벚꽃 내음보다 KF94 마스크 필터 냄새가 더욱 익숙한 봄이다.

한 시간여의 짧은 벚꽃 구경이 끝났다. 으슥한 외곽 지역만 도느라 벚꽃은 많이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엄마에게 방금 본 벚꽃의 기억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향기가 어떻고 냄새가 어떻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다. 벚꽃의 춤사위와 함께 아이의 말 주머니도 함께 춤을 춘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아이를 욕실로 떠밀어 넣었다. 코로나 이후 우리 가족에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외출하면 바로 씻어야 한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다양한 결핍을 안겨 주었다. 오랜 친구들과 나누는 술 한 잔, 영화를 보며 연인과 나누던 농밀한 속삭임, 놀이동산 기구를 타며 즐기던 짜릿한 흥분까지 빼앗아갔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이젠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마스크를 쓰다 보니 사람들의 표정 읽기도 어려워졌다. Untact, 비대면이란 용어가 익숙하게 되어버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감정과 경험의 거리까지 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사람과의 비대면은 잠시 참을 수 있지만, 봄과의 비대면은 어떻게 견뎌내야만 할까.

봄비가 내리고 벚꽃이 다 졌다. 뉴스에선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되고 재유행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한다. 빼앗긴 봄만이 아니라 여름, 가을, 겨울도 마스크를 쓰고 비대면으로 견뎌야 한다는 말이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잔인한 미래다. 오늘도 빼앗긴 봄을 찾아오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마스크를 꺼내 든다. 마스크 필터 냄새는 여전히 역하지만 참아본다. 딸과 함께 벚꽃 핀 뚝방길을 신나게 달릴 그 날을 기다리며.

 

이루나

달거나 짜지 않은 담백한 글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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