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탄신 250주년 특별기획



사람들은 효를 인륜질서의 근본이라 말하면서도 막상 교육에 인용하는 사례가 반인륜적이거나 비현실적이어서 효를 교육받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꾼과 선녀’, ‘손순매아(孫順埋兒)’, ‘향득사지(向得舍知)’, ‘심청전’ 등이 그러한데, 효는 사실성과 현실성, 그리고 의(義)를 추구한다는 점이 간과돼선 안된다.

다산은 『유곡산향교권효문(諭谷山鄕校勸孝文)』과 『열부론(烈婦論)』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효라는 것이 얼음 속에서 잉어가 튀어나오고 눈 속에서 죽순이 솟아나며, 꿩이 던져지고 호랑이가 타라고 땅을 긁는 것과 같은 형태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옛날에 특이한 신령스러움이었던 것인데, 어떻게 그리 쉽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설사 자식의 효성에 기적이 일어났다 해도 의당 자신의 비밀로 가려두고 남이 알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열부(烈婦)라는 것도, 그 아버지가 병들어 죽었는데 아들이 따라 죽었다면 효자가 아니고, 임금이 병들어 죽었는데 신하가 따라 죽었다면 충신이 아니듯이 남편이 병들어 죽었는데 뒤따라 죽었다면 이 또한 열부가 아니며, 다만 소견이 좁은 여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여인을 마을에 정표(旌表)를 세워주고 아들이나 손자에게 호역(戶役)과 요역(繇役)을 면해주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제시한 나무꾼이나 손순, 향득, 심청의 행위는 효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동화에 나오는 나무꾼의 행위는 여인의 목욕장면을 훔쳐본 파렴치범인데다가 선녀의 옷을 훔친 절도범이고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조사불효(早死不孝)의 상징이다.
 
손순(孫順) 역시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식을 땅에 묻어 죽이려 한 인륜을 거역했으며, ‘향득(向得)’ 또한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에 위배된다. 그리고 ‘심청전’에서 심청 은 그 효심(孝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목숨을 버린 행위는 효행(孝行)으로 볼 수 없으며 부모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효는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다(大孝尊親). 때문에 효는 도덕적 정당성이나 절차의 합리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본디 효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부자자효(父慈子孝)’, “부모와 자식은 어떤 경우라도 친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는 자식의 벼리(모범)가 되어야 한다”는 ‘부위자강(父爲子綱)’ 등에서 보듯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의(義)를 추구하는 보편적․이타적 가치인 것이다.

그리고 “효는 덕의 근본이요 모든 가르침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孝德之本也敎之所由生也)”는 『효경』의 내용처럼, 효는 사랑의 근본이요, 가르침의 원천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쇠퇴해가는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을 살리고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효를 가르쳐야 하며, 이 시대에 맞는 효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미 200여 년 전 다산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민대학교 효충사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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