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 경로]

[청년칼럼=서은송]

문예창작학과에서 학부생이던 시절, 학과 모임에서 늘 빼먹지 않고 나오던 주제가 있었다.

“하상욱은 시인인가, 아닌가.”

소설과 동화, 비평과 희곡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작성하는 친구들 모임에서 시를 전공하는 나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치 ‘답을 내놓아라’ 이런 분위기였다고 해야 하나.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시인(詩人)의 정의는 시를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이며, 이에 하상욱의 글은 전문적인 시라고 해야 할지는 정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글을 창조해내어 사람들에게 시와의 유대감을 높인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상욱 이후에 이뤄진 비슷한 형태를 쓰는 작가들은 이를 모방하거나 비슷한 형태로 큰 변화 없이 제2의 하상욱, 제3의 하상욱 등 한 갈래로만 뻗쳐진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픽사베이

요새 20, 30대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흔히 ‘감성글’이라는 것이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교보문고 시 코너에 가보면, 등단을 한 시인의 시집도 많이 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부드러운 하드커버에 따듯한 색감을 가진 일러스트 책 앞에 서있다. 예쁜 그림에 짧은 텍스트가 연인에게 선물하는 용으로, 혹은 자신이 치유받기 위한 용으로 많이들 선택된다.

SNS의 글로 시작되어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까지 이러한 텍스트 소비 형태에 대해서 황인찬 시인은 다가올 시의 파국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시이자, 시의 위기에 대한 타개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중이 읽지 않는 것은 책과 문학작품 등이지 텍스트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황인찬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이에 대한 의견을 말한다. 웹툰과 웹소설은 이미 안정적인 시장을 형성하여 더욱 많은 대중들을 이끌어나가는 반면, 사유와 사색이 불가능한 SNS에서 소설, 시와 같은 문학 텍스트는 SNS에 어울리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SNS에서의 시는 트위터에 문학봇이나 캘리그래피처럼 시의 전체를 소비하는 대신, 일부의 문장을 다른 소비유형으로 변화하여 새로운 배치를 하고 있다. 감성적 문구와 인물, 혹은 예쁜 글씨와의 조화가 미학적으로 변형되어 젊은이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2차 창작이라고 보이는 텍스트의 새로운 소비 형태가 모든 것이 유형화되고 물신화되는 SNS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시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주변화/도구화 시켜 애당초의 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이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SNS에서 최적화된 시의 소비 형태라는 주장에 나는 씁쓸하면서도 신선함을 느꼈다.

더 나아가, SNS 시대의 시는 매체 성격에 걸맞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상욱의 시가 이에 대표되는 새로운 시인데 훅훅 손가락으로 넘기는 페이스북의 수많은 글들에서 멈춤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글이 아닌, 이미지 속에 짧은 글이라는 것이다. 문학성이 있든 없든 간에 대중들에게 ‘시’로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우리는 이 일련의 현상에 아무 것도 관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텍스트 소비현상에 대해서 기존의 문학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을 시인 황인찬이 말하고 있다. 황인찬 시인은 1988년 생으로 마찬가지로 SNS 시대를 직접 살아가고 있는 세대이다. 그 세대에 속해있는 시인으로 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는 게 내심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시, 다른 시, 변종의 시, 우리가 믿은 적 없고 상상한 적 없는 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이 시점은 당대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수많은 논쟁거리를 남겨준다.

이러한 새로운 텍스트 소비 형태는 사회적 정의화와 이에 상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인 주장을 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에 대한 의의를 끊임없이 야기할 필요가 있다.

다만, 새로운 소비 형태를 따라가야 하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막연하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나, 이러한 소비 형태의 한계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쉽게 말해서, 텍스트를 SNS에 최적화시킬 경우 일어나는 문학사의 변화나 전통성에 대해서는 짧게 나마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한계이다.

지난 한해 국내에서 어른 1명이 읽은 종이책 양은 평균 6.1권이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최하위 독서량을 가지고 있다. 그 평균 6.1권 중의 한 권이 SNS에 최적화되어 나온 새로운 소비 형태의 책이라면, 앞으로의 한국문학사는 어떻게 변형될지 종잡을 수가 없다.

국립한국문학관을 설치하는 데만 자그마치 4년이 걸렸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국문학사를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신중한 이 시기,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글의 형태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에 정답은 없다. 단순히 문학도들뿐만 아니라 독자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유지하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생성하려 할 테니까. 하지만 이 문제는 끊임없이 나올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더욱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리라 생각한다.

모두들 문학은 발전하길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를 바란다. 새로운 방향성을 형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주장을 하든 간에 ‘한국문학의 발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빠져서는 안 된다. SNS 시대에서 어떻게 시와 소설이 조화롭게 성장해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에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새로운 길에는 또 새로운 룰이 생길 것이고 아직은 정착되지 못한 SNS의 글의 형태가 갈무리되어 정말로 새로운 문학의 탄생이 될 수도 있다.

매체적 특성에 의한 이러한 혼돈기에 우리는 중점을 잃지 않고, 앞으로 더욱이 섬세하고도 견고하게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은송

제1대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 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한양대 국어국문학 석사과정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