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40]

[논객칼럼=김부복]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은 ‘삼한일통’의 주요 역할을 한 사람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 있다. 손바닥만 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거꾸러뜨린 것은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국사기에도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 누구보다 많다. 김유신은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당한 입장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눈에는 영웅으로 보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의 피(血)와 뇌(腦)를 산과 들에 뿌리게 한 ‘간웅(奸雄)’이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좋았을 뿐이다. 높게 평가했을 리가 없었다.

김유신의 관직은 ‘각간(角干)’이었다. 또는 ‘서불한’이었다. 관직에 ‘뿔 각(角)’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 계급이 ‘대각간’으로 올랐다.

이 ‘각간’을 '뿔한', 또는 ‘불한’이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서불한’의 발음도 ‘쇠뿔한’, 또는 ‘쇠불한’이었다고 했다.

픽사베이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이 ‘불한’이라는 관직이 원망스럽고 껄끄러웠다. 자신들의 나라를 망하게 만든 김유신의 관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뿔한’을 도둑이나 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해버렸다. 이 ‘뿔한’에서 ‘불한당’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떼를 지어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을 ‘불한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김유신은 ‘화랑’ 출신이었다. ‘화랑 관창’ 이야기가 보여주듯 화랑은 나라와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신라의 젊은이들이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이 화랑을 극찬했다. “조선을 조선 되게 한 것이 화랑”이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신채호는 화랑이 ‘임전무퇴’의 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싸움터에서 죽어야 천국의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화랑은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화랑은 하급 장교였다. 이 하급 장교가 자그마치 3000명에 달했다. 화랑 한 명이 한 소대의 병사를 지휘한다고 해도 몇 만 병력쯤은 간단하게 지휘할 수 있는 숫자였다. 김유신 장군도 화랑 출신이다.

화랑의 정신은 당나라와의 싸움에서도 예외 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신라까지 삼키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신라는 당나라를 ‘선제공격’했다. 우리 역사상 드문 선제공격이었다.

신라는 우선 당나라의 군량부터 짓밟았다. 당나라 군사들이 일궈놓은 둔전을 쑥밭으로 만든 것이다. 발끈한 당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자 첫 전투에서만 5300명을 베고 장수 6명을 생포했다.

화가 상투 끝까지 치솟은 당나라는 본때를 보이겠다며 이근행(李謹行) 장군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파견했다. 그래도 신라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크고 작은 18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다.

신라는 애당초 당나라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국력의 차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라는 ‘7년 전쟁’' 끝에 당나라를 쫓아내고 ‘삼한일통’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신채호는 화랑도를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평가가 있으면 엇갈리는 평가도 있는 법이라고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화랑 역시 밉고 못마땅했다. 마침 그럴 듯한 ‘꼬투리’도 있었다. 김유신의 ‘과거사’를 뒤진 것이다.

젊은 시절,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김춘추(金春秋∙604~661)와 만나도록 ‘작전’을 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불에 태워 죽이는 시늉까지 했다. 속임수를 쓴 것이다. 그런 결과 김춘추마저 김유신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랬던 김유신이 나중에는 김춘추의 딸에게 장가를 들기도 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희한한 인척관계’가 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이 꼬투리를 놓칠 리 없었다. 누이동생을 바치고, 딸을 얻은 음탕한 사람을 화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에서 더 나아가 화랑 전체를 깎아내려 버렸다. 여기에서 ‘화냥년’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유교적 시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남녀관계가 상당히 개방적인 시대였다. 김유신과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화랑에게 당한 사람들로서는 화랑이 밉기만 했다. 화랑을 깎아내려야 속이 좀 풀렸을 것이다.

물론, ‘화냥년’의 유래에 대한 정설은 따로 있다.

조선시대에 호란이 일어나 청나라로 끌려갔던 조선여인들은 정조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난리가 끝난 후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당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다. ‘환향녀’라는 말이 ‘화냥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상스러운 말이나 욕설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김유신은 영웅이었다. 신라 사람의 '잣대'로 평가하면 그랬다. 반면 김유신은 ‘불한당’이었고, ‘화냥년’이나 또는 ‘화냥놈’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의 '잣대'로 평가하면 그랬다.

역사와 사람에 대한 평가는 평가하는 ‘잣대’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친일인사’ 또는 ‘친일분자’ 논란이 그랬고, ‘이승만 국부론’이 또 그랬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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