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모옌(莫言) <붉은 수수밭>(紅高粱)

[논객칼럼=김호경]

어느 선까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어느 선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약(Protection of Civilian Persons in Time of War)에 따르면 “전투의 범위 밖에 있는 자와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는 보호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죽이면 안 된다. 그러나 막상 전쟁(혹은 테러)이 일어나면 민간인(특히 여자와 어린이)이 가장 먼저 희생된다.

한 가지 의문은, 만약 이 협약이 없다면 군인은 전쟁에서 민간인을 죽여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1949년 이전에 벌어진 전쟁에서 민간인을 죽인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의 류타오후(柳條湖)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다음해 3월 1일 만주국(滿洲國: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구 등 동부지역)을 세웠다. 그리고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에서 선전포고 없이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붉은 수수밭>에 등장하는 모쉐이(墨水 Moshui) 강 전투는 중일전쟁의 여파로 1939년 음력 8월 9일에 벌어졌다.

붉은 수수밭 책 표지

까오미현 동북마을(高密 東北縣)의 애국심 넘치는 마을 사람들과 일본군 전차부대의 전투는 당연히 피비린내로 끝났다. 까오미 사내들의 무기는 지극히 변변찮아서 새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지만 충천한 사기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이놈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요.”

또우꽌(豆官)은 14살 때 마을 사람들(의용군)과 함께 위잔아오(余占鰲) 사령관을 따라 자오핑로(膠平路)로 간다. 중추절을 7일 앞둔 날이다. 그 일대는 붉은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으로 수수를 이용해 품질 좋은 고량주(빼갈)를 만들어낸다. 양치기 사내아이(훗날 또우관의 아들이자 이 소설을 들려주는 話者)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수수가 붉어졌네 - 일본놈들이 왔다네 – 동포들은 준비했지 – 총을 쏘고, 포를 쏘았네 -”

노래의 기상은 매우 높지만 노래와 현실은 다르다. 일본군은 까오미, 핑뚜, 자오현의 중국인 40만 명을 강제 징발해 탱크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도록 했다. 엄청난 농작물들이 훼손되었고, 노새들이 전부 끌려갔으며, 반항하는 중국인은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당연히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십장(什長)이다. 또우꽌네 고량주 술도가에서 일하는 루어한은 노새도 빼앗기고, 노동에 끌려가 채찍을 맞자 밤에 몰래 노새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불쌍하기는 해도 그렇게 해야 일본군에게 작으나마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붙잡혀 일본군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쑨(孫)씨네 다섯째 아들(孫五)에게 피부를 전부 벗겨내는 형벌을 받는다. 솜씨 좋은 도살꾼 손오는 거부할 수 없어 칼을 들고 작업을 시작한다. 먼저 루어한의 귀를 잡아 다니며 말한다.

“이놈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요.”

그리고 귀를 싹둑 잘라낸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루어한의 피부가 벗겨지는 장면이 처절하게 그려진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독백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은 루어한뿐만이 아니다. 중일전쟁은 1937년 시작되어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9년 동안 희생된 사람은 대략 1200만 명이다.

작가 모옌은 루어한의 죽음을 통해 전쟁의 잔혹성, 일본군의 잔악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모옌은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김호경

피보다 더 붉은 수수밭과 그보다 더 진한 사랑과 죽음

키 160cm, 몸무게 60kg의 따이펑리엔(戴鳳蓮)은 16살 때 딴팅시우(單廷秀)의 외아들 딴삐엔랑(單扁郞)에게 시집갔다. 시댁은 고량주 술도가를 운영하는 부호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축하를 했다. 하지만 딴삐엔랑은 한센병(문둥병)에 걸렸으며 이 사실을 알면서도 따이펑리엔의 부모는 딸을 시집보냈다. 노새 한 마리를 받고 딸을 팔아넘긴 것이다.

시집가는 날 그녀는 홀로 가마에 오르고 북잡이, 나팔장이, 두 명의 가마꾼이 모는 가마는 너른 수수밭을 지나 시댁으로 간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으로 –어쩌면 필연적으로- 가마꾼 위잔아오와 수수밭에서 진한 사랑을 맺는다. 따이펑리엔이 ‘남편은 정말 문둥병자’라고 하소연하자 위잔아오는 단도를 챙기며 간단하게 답한다.

“사흘 후에는 어쨌든 돌아오리다.”

그의 말처럼 사흘 후부터 따이펑리엔의 삶은 즐거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잔악한 일본군이 침략하면서 운명은 또 한번 곤두박질 친다. 마을 사람들은 또우꽌이 누구의 아들인지 짐작은 하지만 입밖으로 말하지 않는다. 어머니조차 아들에게 위잔아오를 양아버지라 일러주었었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기 직전에 진실을 알려준다.

“그 사람이 바로 네 친아버지다.”

전북 김제 죽산마을에 있는 ‘하시모토 농장 기념관’. 일제 수탈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김호경

전북 김제평야의 중심지인 죽산마을에 가면 아담한 하시모토 농장(橋本農場) 사무실(기념관)이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본인은 한국의 최대 곡창지역인 김제로 들어와 여러 개의 대단위 농장을 만들어 수확되는 쌀들을 전부 일본으로 실어갔다. 광복되기 전까지 40년 넘게 일본인들의 수탈과 잔혹한 강제노동은 계속되었다. 그 아픔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 하나,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인 지주들보다 더 잔악하고 야비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 모순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몇몇 작가들이 일제 치하의 참혹성을 그린 소설들을 발표했지만 아쉽게도 <붉은 수수밭> 만큼 세계적으로 읽혀지지 못했다. 모옌의 본명은 관모예(管謨業)이며, 모옌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로지 글로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그 의지로 침략자 일본에 저항하는 중국 민초들의 강인함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수수가 익으면 붉어지고, 수수밭은 붉은 바다가 된다. 그 붉은 곳에서 그네들이 흘린 피는 뜨거운 사랑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 더 넓은 지식을 위한 독서 내비게이션

1. 소설의 무대가 된 산둥(山東)성 까오미현 동북마을(高密 東北縣)은 웨이팡(濰坊) 시와 칭다오(淸島) 시의 중간 즈음에 있다. 전투가 벌어진 모쉐이(墨水 Moshui) 강은 구글맵에 희미하게 나타난다.

2. <붉은 수수밭>은 1986년에 중편소설로 발표되었고, 후에 5편을 묶어 <홍고량 가족>(紅高粱家族)으로 재간행되었다. 1987년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단행본 <붉은 수수밭>은 1997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문고판으로 간행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다.

3. 모옌은 2012년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아시아에서는 4번째). 일부에서는 ‘친정부 어용작가’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2005년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라고 말했다.

4. 중국 소설은 명나라 시절의 4대 기서(奇書)를 출발점으로 본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지>(水滸誌),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西遊記), 작자 미상(혹은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의 <금병매>(金甁梅)이며 여기에 청나라 시대에 간행된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을 포함시킨다. 모두 한국어로 번역이 잘 되어 있다.

5. 중국 근대 문학의 창시자는 루쉰(魯迅)으로 인정되며 대표작은 <아Q정전>, <광인일기>이다. 라오서(老舍)의 <낙타상자>(駱舵祥子)는 인력거꾼 샹쯔의 인생 역정을 통해 중국 근대 역사와 하층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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