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0.05.12 08:50

[논객칼럼=김희태]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흔적을 찾아보자!

조선의 왕 중에서 단종(재위 1452~1455)은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단종과 관련한 내용은 지금도 사극이나 영화 등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 중 하나다. 이러한 단종의 흔적을 간직한 강원도 영월의 주요 관광지 중 영월 장릉(莊陵)과 청령포(淸泠浦)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단종과 영월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로, 이는 『일성록』에 기록된 영월부사 이경오가 상소한 내용 중 영월부에 대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본부는 본래 읍치 내의 민가가 겨우 100호이고 산에 의지하고 물가에 있는 보잘 것 없고 가난한, 도내의 일개 작은 현으로 무인년 이후에 부(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선침(仙寢)과 태봉(胎封)을 10리 안에 모시고 있고, 매죽루(梅竹樓)가 행궁(行宮)과 같으며, 청령포(淸泠浦)에 또 비각(碑閣)이 있어서 이례(吏隷)와 양민을 막론하고 늘 이곳을 수호하고 경계하는 것이 다른 고을에는 없는 중대한 임무입니다.”

- 『일성록』 정조 23년(기미,1799) 3월 14일

위의 상소 중 영월 땅에 있는 선침(仙寢)은 단종의 능인 장릉을 이야기한다. 또한 언급되는 매죽루(梅竹樓)의 다른 이름은 자규루(子規樓)로, 현재 관풍헌(觀風軒) 옆에 남아 있다. 관풍헌은 영월의 객사로, 홍수로 인해 서강의 물이 범람했을 때 단종은 청령포를 떠나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이 무렵 단종은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심경을 담은 자규사(子規詞)를 남겼다. 이 시(詩)는 지금도 자규루 위에 오르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樓머리(주:자규루)에 기대었노라(含愁情依樓頭)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었을 것을(無爾聲無我愁)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寄語世上苦榮人)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愼莫登春三月子規樓)

자규루(子規樓), 과거 매죽루(梅竹樓)로 불렸다.@김희태

 

자규루 위에서 볼 수 있는 자규사(子規詞)@김희태

또한 매죽루(梅竹樓)가 행궁(行宮)과 같다는 말은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렀던 것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청령포에 비각(碑閣)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영조가 친필을 내린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각(端廟在本府時遺址碑閣)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영월에 남아 있는 단종의 흔적을 수호하고, 경계하는 것이 다른 고을에는 없는 중요한 임무인 것을 영월부사 이경오가 올린 상소를 통해 알 수 있다.

■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서로 다른 기록들, 영월 땅에 묻힌 단종의 이야기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치적 안정성의 결여 부분이다. 문종이 승하할 당시 어린 나이였던 단종은 아직 정치적 기반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경우 대비나 왕비 등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단종의 경우 할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을 염려했던 세종은 황보인(?~1453)과 김종서(1383~1453) 등의 대신들을 불러 단종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게 되고, 이러한 고명대신들은 단종을 왕위에 올린 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왕실의 인척을 견제했다. 당시 장성한 세종의 왕자들 중 단연 위험한 인물은 수양대군이었다. 예상대로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을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결국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로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된 형상이다.@김희태
자규루에서 바라본 관풍헌, 이 해 여름 서강이 홍수로 물이 불어나자 처소를 관풍헌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단종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김희태

이후 상황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시작은 사육신에 의한 상왕복위운동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빌미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영월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시금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단종의 운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서로 상이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우선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한 반면, 『숙종실록』에서는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단종에게 이같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자 함께 따라온 공생(貢生)에 의해 교살을 당했다는 등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월 장릉(莊陵),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수도권을 벗어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김희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엄흥도. 훗날 엄흥도는 이 공을 인정받아 공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게 된다.@김희태

단종의 시신은 버려진 채 방치되었고,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에 의해 묘가 조성되었지만 한 동안 묘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황상 후자의 기록(숙종실록)이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 행방이 묘연했던 노산군의 묘는 1541년(=중종 36년) 영월군수로 온 박충원에 의해 발견됐다. 이후 박충원은 제문(祭文)을 지어 묘소에 올렸는데, 그 내용 가운데 “왕실의 원자로서 어리신 임금이었네, 청산의 작은 무덤 만고의 쓸쓸한 혼이로다”라고 적고 있다. 때문에 영월 장릉의 능역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과 노산군의 묘를 찾았던 박충원의 낙촌비각(駱村碑閣)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연으로 인해 영월 장릉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와는 그 모습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정자각 너머 능침이 자리하고 있는 데 비해, 장릉은 정자각의 전면이 능침의 옆면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능침 역시 무인석이 없고, 석양과 석호 등이 부족한 것 역시 애초에 왕릉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종의 복권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가 부르는 단종(端宗)은 묘호로, 묘호의 경우 종묘의 신위를 모실 때 붙여졌는데, 통상 왕이 승하한 뒤 다음 왕에 의해 붙여지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영월 땅에서 세상을 떠날 당시 단종은 왕이 아닌 노산군으로 불릴 때였다. 그러다 1698년(=숙종 24년) 공식적으로 단종(端宗)의 묘호를 받으며, 왕호를 추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단종과 관련이 있는 장소의 재조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단종의 신위는 종묘에 부묘가 되었으며, 무덤 역시 기존에는 노산군 묘로 불렸으나, 이때부터는 장릉(莊陵)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영조 때 실전된 단종의 태실을 찾아 수개(修改)하기도 했는데, 사천에 있는 傳 단종 태실지로, 지금도 이때 가봉한 석물 일부가 남아 있다.

청령포 단종어소의 전경. @김희태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김희태

이처럼 단종의 복권은 유배지였던 영월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다. 지금도 청령포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외형상 육지 속의 섬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고립된 형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지게 되는데, 『매산집(梅山集)』에 기록된 “이서청령포금표비육자 즉도백윤양래소위건야(書淸泠浦禁標碑六字 卽道伯尹陽來所爲建也)”와 『관암전서(冠巖全書)』에 기록된 “각왈청령포금표비 즉고판서윤양래소입운(刻曰淸泠浦禁標碑 卽古判書尹陽來所立云)”을 통해 당시 영월부사인 윤양래가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령포 금표비, 전면에는 청령포금표(淸冷浦禁標)가 새겨져 있다.@김희태

 

금표비의 왼쪽, 숭정구십구년병오십월일입(崇禎九十九年丙午十月日立)이 새겨져 있다.@김희태

금표비의 뒷면, 동서삼백척 / 남북사백구십척 / 차후니생역재당금(東西三百尺 / 南北四百九十尺 / 此後泥生亦在當禁)이 새겨져 있다.@김희태

한편 청령포 금표비의 앞면을 보면 청령포금표(淸冷浦禁標)가, 비의 왼쪽에는 숭정구십구년병오십월일입(崇禎九十九年丙午十月日立)이 새겨져 있다. 숭정(崇禎)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신종(=숭정제)의 연호로, 숭정 99년을 환산해보면 1726년(=영조 2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표비의 뒷면에는 동서삼백척 / 남북사백구십척 / 차후니생역재당금(東西三百尺 / 南北四百九十尺 / 此後泥生亦在當禁)이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금표의 범위를 알 수 있다. 청령포 금표의 범위는 금표를 기준으로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이며, 이후 청령포 주변으로 진흙이 퇴적되는 곳 역시 출입을 금지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건 청령포 단종어소에서 볼 수 있듯 단종의 처소였다는 점과 백성들이 출입해 벌채를 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해당 금표비의 존재는 단종의 복권 이후 단종과 관련이 있는 현장이 어떻게 변화하고 인식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지점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nongaek.com)도 보장합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bogirang@naver.com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매체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논객닷컴 | (03163)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2, 대일빌딩 1108호
대표전화 : 070-7728-8569 | 팩스 : 02-722-65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종국
제호: 논객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78 | 등록일 2011년 9월 27일 | 발행일: 2011년 10월 1일 | 발행ㆍ편집인 : 권혁찬
Copyright © 2020 논객닷컴.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