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청년칼럼=이광호]

노동자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이다. 노동자가 일을 못하면 소비도 자연 줄어든다. 위축된 경제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성장을 어렴풋이나마 기대했다.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정규직에게는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혹은 지금의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사회는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체가 멈출지 모른다는 위협은 '성장'이라는 환상을 걷어냈다. 동시에 세계의 민낯이 드러났다. 집단 감염이라는 위험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사회적 안전망이 확충되어 있지 않은 국가와 계층에서 문제가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고 유가는 급락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던 프리랜서,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사회도 움직였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재택근무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적극 권유되었고, 이상에 불과하다거나 재원을 충당할 수 없어 비현실적이라던 기본소득과 유사한 취지의 재난지원금 또한 전 국민에게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의지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코로나 19의 글로벌 대유행이라는 특수적 상황에 일시적으로 도입된 것이라 해도, 근무환경의 변화와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마주했어야 했기에 마중물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재난은 불평등하게 작동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아프면 쉬기.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나 현장 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앞에서 휴식을 선택할 수 없다. 고용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아파서 쉬겠다는 말을 하려면 돌아갈 자리가 없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일을 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삶이 흔들린다. 사회적인 고통을 분담하고 물리적인 이동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고립은 사회적 고립이자 사망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복지는 가장 절실한 자들에게 신속하게 지급되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픽사베이

우리는 살기 위해 일을 한다. 동시에 일을 하다 죽는 사회다. 가장 안정적이라 평가받는 공무원들도 이번 사태로 인해 과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 이천 물류창고에서는 화재로 38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원인과 결과가 매번 반복되는 사고다.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있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법대로, 규정대로 공사했다면 사고를 피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 있었다. 그들은 일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의 노동자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었을 뿐이다. 그러나 재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기에 기피하는 직업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장 취약한 상황에 있는 노동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방식의 대응을 요구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무급휴직 동의서를 받았다는 기사에는 '해당 신문사 직원들의 월급을 삭감해서 이주노동자에게 지원해주면 되겠다', '자국민을 먼저 보호해라', '외국인 노동자까지 걱정해야 하느냐'는 댓글이 1000개 이상의 추천을 받아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댓글 추천수가 국민 정서나 논리성, 합리성을 대변하는 지표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추천수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시간제 강사 등이 합리성을 이유로 하나 둘 잘려나가게 되고, 이것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다음엔 자국민, 정규직이 감원이나 무급 휴직의 대상이 될 순서다.

우리 사회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그'런 직장', '그'런 사람, '그'게 싫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직장에 다니면 된다는 식으로 '그'와 '우리'를 분리했다. '네가 노는 사이에 열심히 공부 한 사람이 더 좋은 직업을 갖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했다. 기업이 능력에 맞는 사람을 채용하는 건 합리적이지만, 그게 누군가의 노동을 마음대로 평가하거나 비판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막노동'이라는 말로 낮춰 부르는 직업이 다른 사회에서는 기술직으로 평가받는다. 직업에 귀천을 만든 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한 바로 우리 사회다. 우리가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절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내 꿈은 노동자다. 노동자가 되기 위해선 다시 경쟁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불안하지만 내가 땀 흘려 노동한 대가로 내 삶을 꾸려나가길 원한다. 그 꿈을 이룬다고 행복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은 직장을 구해도 사라지지 않을 테고,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자리에 불안해하거나, 언제 사고에 직면해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할 거다. 우리 모두가 불확실성에 직면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안전한 곳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기보단 안전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낫지 않을까. 능력에 맞게 벌되 모두가 최소한의 생계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성장이라는 환상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나는 괜찮겠지. 나는 아니겠지. 남의 일이겠지, 라는 생각이 멀어졌을 때. 전혀 관계없을 줄 알았던 사람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걸 전 세계가 재발견하게 되었을 때 말이다. 물론 다시 봄은 오겠지만 그 따뜻함에 취해 오늘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성장이라는 환상이 걷히고, 또 다시 위기가 왔을 때 우리의 노동이 서로의 손을 잡고 설 수 있기 위해 말이다.

*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의료진과 질병본부, 정부, 국민 모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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