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따뜻한 생각]

[청년칼럼=김연수]

삶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나는 지금 분명 겨울일 것이다.

해가 바뀌고 꽃이 피며 햇살이 가득한 시기가 왔다. 창밖처럼 몸과 마음도 그런 시기라면 좋으련만 놀랍게도 난 기나긴 겨울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게 내리는 비를 가려준다고 믿었던 사람이 결국 나를 젖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 이번에도 아니구나’ 싶었다. 이제는 조금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하며 새롭게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가족, 연인, 친구라는 존재는 가까운데 왜 계속 서로를 잘 모르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을까. 함께 하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타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건 그게 고의든 아니든, 악의가 있든 없든 빈말로라도 제때 사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과 상념은 비단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이런저런 관계를 유지하고 끊어내며 감정의 골을 뼈저리게 겪는다. 그 상대는 떼어낼 수 없는 가족, 오래된 친구, 잊을 수 없는 연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드라마나 책, 노래 가사에서는 대부분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요즘은 그런 내용이 아니면 큰 인기를 끌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마음을 길게 잡아 두지는 못한다.

지난달까지 크게 흥미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채널을 고정한 채 눈여겨 보게 되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책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아주 잔잔하고 템포가 느린 드라마였다. 성격이 급한 한국 사람의 특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서인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구나 겪었을 법한 소소한 이야기와 내면, 관계 등을 차분한 시선으로 그려낸 점은 호평할만 했다. 본 드라마 속 인물들은 동시간대 다른 채널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편안했고 깊이 공감했으며 인물의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이 책인 만큼 인물마다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느낌이었고 그것을 듣고 보는 데 의미 있었다.

픽사베이

드라마 속 주인공 해원은 일과 직장생활 내 본인 입지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며 만감이 교차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원은 오랜만에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을 갖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학창 시절을 망쳐버린 주범과 마주치게 된다. 술을 한잔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난 그 말이 참 싫어. 오해라는 말. 뭐가 오해야. 그냥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실수였다. 미안하다. 그러면 되지. 난 그거 변명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는 뜻이잖아.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네가 잘 못 이해했다는 뜻. 너는 의사소통에 센스가 없어서 내 행동을 잘못 오해했다는 뜻, 아주 끝까지 남의 탓만 하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지. 난 뭘 오해했다는 건지 모르겠어. 난 오해한 게 없거든. 난 김보영이 잘못했고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있으니까.”

일상생활에서 위와 같은 일은 꽤 빈번하게 발생한다. 말은 참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조금만 다르게 말해도 종종 듣기 불편할 때가 있다. 해서 그것에 관해 불편함을 정중히 호소하면 장난일 뿐인데 예민하게 군다는 식의 반응과 마주하게 된다. ‘어머, 오해에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라는 사과가 생략된 답변이 반복되면 남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뿐이다. 이러한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주인공을 힘들게 한 보영은 참 얄미웠다. 곧 죽어도 제 잘못은 아니고, 그럴듯한 말로 자신을 좋게 포장해서 끝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남으려 애쓰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러나 드라마답게 둘은 후반부에 화해 아닌 화해를 하게 된다.

“금이 좀 가면 안 되는 거야? 꼭 흠이 없는 식탁에서만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무엇이든 오래되다 보면 흠도 생기고 상처도 생겨. 완전무결한 관계는 없다고 생각해. 금이 가면 좀 어때, 상처 좀 주고받으면 그건 또 어때? 우린 다 완벽하지 않잖아. 그래서 서로한테 미안해야 될 일들을 만들고 또 사과하고 또다시 붙이고, 그러면서 사는 거야. 내가 너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긴 했지만, 난 정말 다시 기회를 얻고 싶었어. 네 마음이 여전히 아니라면 기다릴게.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르지. 조금 나아질지.”

마침내 보영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 그 사과를 받으라고 해원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보영의 말처럼 흠이 없는 관계는 없다. 하지만 그 흠이 아주 깊어진다면 돌이키기 힘들다. 미안한 일을 만들었다면 늦지 않게 사과하고 흠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쉽고 당연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의외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서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대사를 썼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루를 평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자극적인 소재의 드라마보다 이런 드라마가 더 유익할 것만 같다.

어린 시절부터 사과보다 변명이 앞서는 게 싫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다른 그 무엇보다도 급조된 두리뭉실한 변명이 실망스럽곤 했다. 역시 적당히 가식적인 사람으로 거리를 두며 사는 게 속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헤어질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연애하는 것처럼 믿을 사람 하나 없지만 좋은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사람들에게 동지애를 느낀다. 그래도 세상은 넓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은 많을 거라고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씁쓸하기만 하다. 이런 때일수록 아직 내 곁에 남은 멋진 사람들에게 애정을 전해야겠다. 비슷한 겨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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