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논객칼럼=김철웅]

 며칠 전 필자는 처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가벼운 논쟁을 벌였다. 지난달 말 경기도 의회가 주한미군 부대 주변 ‘기지촌 여성’의 생활안정 등을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한 것을 두고서였다. 나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조례가 제정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처는 그런 조례가 나온 것을 무분별한 복지 확대로 규정하고, 그런 곳보다 더 절실한 곳에 써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해석하자면 ‘소나 개나 복지 혜택에 눈독을 들이는데, 그러면 안된다’는 거였다.

 처의 정치 성향은 이른바 ‘대깨문’은 아니지만 문빠 쪽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었다. 한 진보 신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비슷한 취지였다. ‘…그 시절 양공주 양공주 하면서 외제차 몰고 해외 물건 비싸게 팔아먹던 여자들이 이제는 기지촌이라고 사회적 낙인과 어려움을 호소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다고? 진짜 대한민국 꼬라지 잘 돌아간다…’

 나는 진보적 성향이면서도 이번 ‘기지촌 여성’ 지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보려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기지촌 여성 전력자의 ‘피해’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죽음에도 사회적 죽음이 있다. 세월호 참사엔 실존적, 사회적 아픔이 뒤섞여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듣다 소중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죽음은 그 하나하나가 실존적인 아픔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거대한 사회적·구조적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며 의당 사회적 위로가 필요한 것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도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경기도는 현재 도내 기지촌 여성이 70~80대 고령의 300~4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에레나가 된 순희’란 옛날 가요 하나를 예로 들겠다. 1953년 한정무가 처음 불렀고 안다성이 재취입해 크게 히트한 탱코풍 노래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라…>

 제목부터 상상력을 강하게 발동시킨다. 역전 카바레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곳일 터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순희는 에레나란 서양 이름을 쓰는 여자가 되어 춤을 추고 있다. 필시 가슴 찡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 보편적 체험이다. 이른바 양공주가 되어 기지촌을 떠돌던 ‘에레나’ ‘매기’ ‘안나’는 얼마나 많았던가.

 국회에 계류돼 있는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관련 자료에 이에 대한 통계가 있다. 기지촌 성매매여성의 수는 1940년대 1639명, 1950년대 4049명, 1960년대 10000명, 1970년대 16195명, 1980년대 328명, 1990년대 451명, 2000년대 645명, 2010년대 856명이다. 다 합치면 34163명이다(국회 예산정책처 자료). ‘에레나가 된 순희’가 나온 1950년대에 이미 4000명이 넘었다. 이런 슬픈 노래가 나온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2008년 이후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등 현장 단체들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입법과 조례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결실을 맺기 어려웠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는 여성신문 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주된 이유는 보수 진영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남성들의 ‘돈 받고 한 자발적인 행위 아닌가?’ ‘나라가 없었던 시기도 아닌데 일본군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한미동맹을 깨려는 것인가?’ 등 발언과 편협한 시각이었다.” 그는 “2018년에는 동아시아 최대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시에서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관련 조례를 제정하려 했으나 상인번영회 등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해 여성들은 2014년부터 국가배상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7년 1심과 2018년 2심 재판부는 ‘국가의 책임’, 즉 성매매 중간매개 및 방조,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부분에 대한 책임과 국가가 기지촌을 운영·관리한 것 자체에 대한 위법성을 인정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 2년이 넘도록 대법원에서는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안 공동대표는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며 대법원의 각성을 촉구했다.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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