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 인사이트]

[논객칼럼=권오용]

전경련이나 대한상의같은 경제단체 장들은 특별한 보수가 없다. 아마 중소기업중앙회장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기업인들이 한다. 반면에 무역협회장은 보수를 받는다. 그런 탓에 항상 낙하산을 타고 정부 인사가 회장직을 맡는다. 장관도 모자라 심지어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도 무역협회장을 맡는 걸 보면 보수가 상당한 것 같다. 총리와 장관까지 지낸 분이 명예직도 아닌 이익단체의 수장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면 돈이 좋기는 좋은가 보다.

전경련이나 대한상의같은 순수 경제단체장은 보수는 없지만 할 일은 많다. 얼마 전 동아일보 경제부장을 지냈던 고승철 작가가 단편소설을 냈다. 제목은 '전경련 회장 실종사건'. 첫 부분에 전경련 회장의 하루 일정이 나왔다.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살인적인 스케줄이 소개됐다. 보수는 없고 일만 많지만 그렇다고 명예가 따라 오지는 않는다. 전경련은 원래 욕을 많이 먹는 단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약방의 감초같이 재계 의견이라면서 전경련의 입장을 물어온다. 사안이 민감해 행보를 자제하면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비난한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 재벌의 집단 이기주의라고 매도하기 일쑤다.

대한상의 전경@ 오피니언타임스

그러면 왜 전경련 회장을 하려 하느냐고? 사실 전경련 회장은 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전경련 회원(대기업)들이 아무나 회장으로 모시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려고 하면 개인의 성취에 더해서 공동체에 대한 소명의식, 역사인식이 아닐까 한다. 개별 회사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에 대해 나름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해 보자는 이런 애국적 견지가 전경련 회장 취임의 가장 큰 동기라고 생각한다.

최장수 전경련 회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김용완 회장, 경방의 주력인 방직산업은 지금으로 치면 반도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온 실로 옷을 만들어 팔았다. 섬유제품은 당시 한국 경제 제 1의 수출 품목이었다. 거기다 국내 기업공개 1호라는 기록을 가질 정도로 투명성을 자랑했다. 다른 회원사들이 전경련에 와서 자기 몫을 가져가기 위해 애쓸 때 김용완 회장은 경방에 손해가 나더라도 다 들어줬다. 그래서 경방 임원들은 김 회장이 전경련 가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한국 경제 대도약의 전기가 된 8.3사채동결 조치도 김 회장의 사심 없는 건의가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김 회장은 기업이 돈 벌어 봐도 사채업자가 고리로 다 뜯어 간다며 이를 정리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 때 박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김 회장이 증설을 위해 가지고 있던 공장 부지를 팔아 사채를 모두 정리했다는 것. 그러니까 사채가 정리돼도 경방은 하나도 득 보는 것이 없다는, 문자 그대로 사심없는 건의임을 확인하고 8.3조치를 결행했다고 한다. 회원사들의 의견에 반해 추진한 것도 있다. 의료보험제도가 대표적이다. 빈익빈부익부, 소위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회원사들을 설득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의 방역과정에서 다시금 그 존재감이 확인된  의료보험제도가 사실은 전경련이 산파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가장 어린 연륜에도 전경련이 경제단체의 수장으로 대접받은 것은 이런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직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이었던 선경(지금은 SK)의 최종현 회장은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정부로부터 따냈다. 전문가들의 평가로는 누가 봐도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선경은 그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이동통신사업을 했던 경험을 가진 유일한 회사였다. 그러나 여론은 들끓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사돈에게 줬다고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1주일 후 최 회장은 사업권을 반납했다.

최 회장이 사업권을 반납한 며칠 후에 전경련 회의가 열렸다. 당시 어느 회장이 한 반년만 버티면 될 텐데 하고 아쉬워하자 “다음 정부에 가서 실력으로 따죠” 그러며 담담해 했다. "속상할 텐데.."하고 다른 이가 그러자 “한 30분 심호흡을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던데요”라고 말해 오히려 질문한 사람을 머쓱하게 했다. 후에 최 회장은 사업권 반납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 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사업 기준은 나라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의 사업권 획득을 극력 반대했던 김영삼 정권 아래에서 다시 따내 실력으로 모든 의혹을 깔끔히 씻어 버렸다. 그가 절차적 적법성에 매달렸더라면 그 때는 이겼을지 몰라도 두고두고 정경유착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됐을 것이다. 나라를 염두에 둔 그의 기업관으로 오늘의 SK텔레콤은 정경유착의 의혹을 씻고 고객기반의 세계적 통신회사로 클 수 있었다.

역대 재계 수장들의 안목과 수범에 비하면 지금 경제단체장의 위상은 너무나 초라하다. 위기가 반복되면서 팽창할 대로 팽창한 정부의 독주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닥쳐진 위기와 과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숨어만 있는 경제단체장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전경련의 쇠퇴로 실질적인 재계수장이 된 대한상의 박용만 회장은 얼마 전까지 두산그룹의 회장을 지냈다. 그가 경영했던 두산그룹은 지금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규제완화를 외쳐도 두산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해도 자기 기업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역할을 인정받느냐는 원초적 질문에 부딪친다. 박용만 회장의 탁월한 능력과 열정에도 그의 노력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 대한상의는 물론 한국 경제 전체에 미치는 상징성을 고려해서라도 더욱 자신감있고 솔선할 수 있는 재계의 수장을 맞이함이 바람직한 시점이다.

권오용

전 SK 사장

(재)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CCO클럽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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