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논객칼럼=이영환]

사회가 개인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하며 ‘철의 여인’이라 불리면서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수상을 역임했던 마가렛 대처는 1987년 영국 잡지 《위민스 오운(Women’s Own)》과의 인터뷰에서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사회를 부정하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이 말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전후 맥락을 무시하고 일부만 인용함으로써 오해를 유발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왜냐하면 대처 수상은 사람들이 개개인의 특수한 문제까지 정부가 해결해주어야 한다며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를 사회에 내던지는데 도대체 사회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 어떤 정부도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돌본 후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이 우리 의무다”라고 한 것은 사회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을 묻는 말이다. 대처 수상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책임도 강조했다. 그래야만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없더라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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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개인들을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연결시켜주는 복합적인 네트워크로서 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적절하게 묘사했듯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회는 상상의 질서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실체다. 이 점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개미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대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저서 『지구의 정복자』에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백 만 종(種) 가운데 벌, 개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해 불과 20종만이 진사회성(eusociality)을 획득했다고 말했다. 진사회성은 집단의 구성원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의 속성이다. 따라서 진사회성의 핵심은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이타적으로 다른 개체를 돌봐주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는 진사회성이 출현하게 된 경로에 대해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사회성으로 향하는 경로는 「집단 내 개인들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 대 「집단들 사이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사이의 경쟁을 통해 도출되었다. 이 게임의 전략들은 세밀하게 조정되는 이타성, 협력, 경쟁, 지배, 호혜성, 변절, 기만의 복잡한 혼합물이었다.”

이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절묘한 상호작용을 통해 진사회성이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형성해온 인류 역사에서 진사회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오직 개인만을 강조하는 이기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타심을 압도했다면 사회는 해체되었을 것이다. 반면 개미 사회와 같이 개별 주체는 없고 오직 사회를 위한 이타심만 강조하는 질서가 형성되었다면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만 남았을 것이다.

이런 두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있다. 그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를 바탕으로 공동선(common good)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행복이나 복지를 공동선으로 제시한 이후 공동선은 서구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으나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이 점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존엄성, 연대, 협력, 신뢰, 정의 및 공평과 같은 가치, 그리고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공공재나 공유자원과 같은 것이 공동선의 공통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공동선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모두 망라한다. 예컨대 공원이나 도서관,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공중보건 시스템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공동선은 특정 이데올로기나 지역 및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구글 검색을 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정말 기이하다. 몇 년 전 하버드대학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었을 때 잠깐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곧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체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과거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거와 같이 특정 정치세력의 선동이나 조작에 의해 일반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종당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선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요소가 있다면 대중적 담론을 통해 결국 도태될 것이다. 오히려 공동선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다수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다. 허울뿐인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지 결코 배타적이 아니며,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공동선이 제대로 확립된 스웨덴이나 덴마크, 그리고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개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한편 공동선이 쇠퇴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사실상 위축되고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을 들 수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저서 『The Common Good』에서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의 회복이 시급하다면서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근본 원인으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whatever it takes to....)”라는 사고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대표적인 사례로 정치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다가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 20세기 최고경영자로 추앙받던 미국 GE의 잭 웰치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시행했던 구조조정과 대량해고, 그리고 대법원판사였던 루이스 파월의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보수세력이 정치, 경제 및 교육 분야를 장악해야 한다'는 “파월의 메모”를 들었다.

라이시 교수는 이들이 남긴 영향이 미국 사회 곳곳에 만연함으로써 다민족사회인 미국을 지탱했던 공동선이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불평등과 양극화를 비롯해 미국 사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정점에 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라는 유산을 물려받아 이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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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공동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파괴적 혁신과 글로벌 팬데믹이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도 공동선에 대한 논의는 절실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의 근본 원인은 공동선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분쟁을 해결하는데 적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분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실정에 적합한 공동선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립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선에 관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원인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점과 실행 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공동선의 내용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공동선을 훼손시키는 것들을 공동악(common bad)으로 규정한 후 이 가운데 사회공동체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들을 추방하는 캠페인을 제안하고 싶다. 공동악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그야말로 반사회적인 요소다. 필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대표적인 공동악으로 도덕적 해이와 지대추구행위를 들고자 한다. 그밖에 다양한 공동악이 있지만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권력을 장악한 소수가 범하는 도덕적 해이와 지대추구행위는 사회 전반에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고질적인 공동악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시 추진했던 여러 정책이나 결정이 도덕적 해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법정 공방을 통해 밝혀졌다. 그밖에 이른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이들이 내리는 의사결정과 이에 따른 행동 중 상당 부분은 도덕적 해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통틀어 공통된 현상이다.

예컨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운용 관련 의혹은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육체적 고초를 겪은 분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이 분들이 위임해준 참 뜻을 펼치기 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는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관련 인사들이 부실한 회계처리를, 큰일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실수’라고 변명하는 데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덕적 해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의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지대추구행위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는 기여한 바가 없으면서 기존의 가치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지대추구행위는 도덕적 해이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더 넓은 개념이다. 권한의 위임이 없는 경우에도 지대추구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세시대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 내를 흐르는 강에 쇠줄을 설치하고 통행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는 것은 지대추구행위에 해당된다. 로비활동이 합법화되어 있는 미국에서 로비스트들이 정부의 보조금을 더 얻어내기 위해 활동하는 것도 지대추구행위에 해당된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특정 기업을 지원하는데 예산을 배정하도록 압력을 넣은 후 이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명목으로 기부를 받는 것은 지대추구행위와 도덕적 해이의 종합이다.

공동선과 관련해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공동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는 개념 정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선을 훼손하는 행위를 근절한다는 관점에서 공동악의 리스트를 만들어 이를 추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고 사회규범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가장 악질적인 공동악부터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것이다. 만약 이런 취지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는 스스로 사회의 암적 존재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둘째 공동선에 관한 논의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 사회가 주도해야 한다. 이 작업을 정부가 주도한다면 이는 반대 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프레임에 갇혀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예컨대 현 정부가 적폐청산을 내세운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대착오적이다. 과거 정부에서 부정부패 추방, 정의사회 구현, 경제민주화, 모두 부자 되는 나라 등 현란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민이 주도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에 적합한 공동선 운동과 우회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공동악 추방 운동이 동시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과 시민단체는 훗날 집권세력의 일부가 되려는 부질없는 야망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운동이 정의기억연대와 같이 권력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항상 권력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순수하게 시민운동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부, 시장, 사회 세 부문이 상호 견제를 통해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본인이나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 대의로 위장한 독선과 이기심이 뿜어내는 악취는 사회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 이는 공동선을 함양하는 데 치명적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식공유광장(www.iksa.kr) 운영

 <시장경제의 통합적 이해> 외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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