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뇌는 상상의 감정과 실제 감정을 구분하지 못한다’

주말 오후 3시 13분, 6km 지점을 통과할 즈음이었다. 러닝화 밑창이 화끈거리기 시작할 무렵, 엊그제 읽은 뇌과학 책 속 문장 하나가 헬륨 풍선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요컨대 우리가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특정 상상을 할 때 –이를테면 한강 다리가 무너져 내 위로 쏟아지는 상상 등 – 뇌는 찰나일지언정 실제로 그 사건이 눈앞에 들이닥친 것처럼 긴장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해당 감정은 무의식의 어딘가에 저장돼 두고두고 영향력을 끼친다고 했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행복한 상상을 자주해서 뇌를 속이라고, 노인정 웃음 교실에서 인용될법한 결론과 함께 책은 마무리됐었다. 영화 <타짜>의 아귀가 정마담한테 뭐랬더라. 상상력이 풍부하면 인생 고달프다고 했던가. 나름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었네 그거. 이런저런 잡념으로 두 허벅지에 쌓여가는 젖산을 견뎠다. 오늘은 완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은 날이었다.

하천변 다리 밑 그늘쉼터는 간만의 화창한 날씨에 출석하듯 나온 주민들로 북적였다. 썬캡에 예식장갑, 등산복까지 완비한 중년여성들이 지압 훌라후프를 돌렸고, 벤치에 모여 장기 훈수를 두는 노인들의 얼굴은 이미 불콰했다. 북적한 인파를 통과할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던 중, 거대한 진돗개 한 마리가 시선을 끌었다. 주인인 듯 보이는 70대 노인의 옆에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앉은 녀석은 보행로 바로 옆에서 파수꾼의 위엄을 견지하며 자기 앞을 지나는 행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노인은 풀린 목줄을 손등에 휘감은 채 일행과의 한담에 여념이 없었다. 하품을 하느라 잔뜩 벌어진 녀석의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픽사베이

탁탁탁. 가까워지는 내 발소리에 녀석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봤을 때, 나는 이미 너무 가까이 있었다. 녀석의 주둥이가 일순 주름으로 일그러지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순간.

오른쪽 종아리에 쇠꼬챙이가 꽂히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는 쓰러졌다. 비명은 성대를 넘지 못하고 몸통 안에서 메아리쳤다. 녀석은 유구한 사냥 본능대로 내 다리를 뜯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리에 채 꽂히지 않은 이빨 두어개가 번뜩거렸다. 아프다는 생각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기도를 틀어막았다. “이놈 새끼야!” “하지마! 하지마!” 노인이 녀석을 붙들려 했으나 그의 앙상한 팔은 날랜 녀석의 몸통 언저리에서 허우적거려 차라리 쓰다듬는 것에 가까웠다. “어머어머” “119 불러” 따위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진짜 이렇게 끝인가.

“지나갑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중년 남성의 외침에 나는 잠깐의 공상에서 깨어났다. 나는 보행로를 이탈해 녀석으로부터 족히 10걸음은 떨어진 잔디밭 위를 통과하던 참이었고, 녀석은 얌전히 주인 옆에서 행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노인은 풀린 목줄을 휘휘 돌려가며 친구와의 잡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압 훌라후프가 등산복 위를 스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지속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여전히 좋은 날이었건만, 이상하게 전보다 가빠진 숨이 버거웠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뜨겁던 땀방울들 사이로 피어나는 식은땀이 서늘해 나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위에서, 나는 몇년전 시골 본가에서 키우던 개만 보면 내 등 뒤로 숨던 어린 조카를 떠올렸다. 어른들은 안 문다고, 한번 만져보라고 미소 지었지만 조카의 울먹임은 그치지 않았다. 조카의 뇌리에는 어떤 종류의 상상과 감정이 도사렸던 걸까.

우리 개는 안 문다는 말만큼이나 무용한 말은 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목줄도 없이 활보하는 개를 보며 오늘도 누군가는 상상의 이빨에 살갗이 찢겨 나갔으리라. 뇌는, 상상의 감정과 실제 감정을 구분하지 못한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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