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 조선왕릉, 그 유일한 이야기]

[논객칼럼=이상주]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사후 공간이 헌릉(獻陵)이다. 두 능이 같은 언덕에 조성된 쌍릉으로 대모산 자락인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내곡동 산 13-1)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仁陵)도 있다. 같은 영역에 함께 있기에 흔히 헌인릉으로 불린다.

조선 초 왕릉 곁에는 절이 있었다. 왕과 왕비가 묻힌 능을 수호하는 원찰(願刹)이다. 건원릉의 개경사, 정릉의 흥천사, 후릉의 흥교사 등이다. 그런데 조선의 절대 권력자 태종의 헌릉에는 원찰이 없다.

태종의 제향일에 후손들이 헌릉에 모여 있다. @이한영

조선 초의 원찰 건립에는 태종이 거의 관여했다. 태종의 원찰 건축은 효도 차원이었다. 조상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능 근처에 절을 지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사찰 건립은 반대했다. 유학자인 태종은 불교의 사찰에 거리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효도 차원에서 스스로의 신념 보다는 조상의 마음을 먼저 생각했다. 조선 초 왕릉의 원찰에는 태종의 효와 가치관이 스며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고통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아픔이다. 생명의 유한함에 인간은 한계를 느낀다. 그 허무함과 외로움을 이겨내게 하는 게 종교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정신적 위안을 불교에서 얻었다. 법당은 마음이 고요해지는 힐링의 장소다. 특별히 삶을 달리한 사람의 명복을 빌며 산 사람이 평정을 찾는 절이 원찰이다.

국가시책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내세운 조선의 지배층도 삶과 죽음의 궁극적 질문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 시대에도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계속됐다. 상당수 왕족과 유력 인사가 죽은 자를 기리고, 자신과 가족의 소원 성취를 위해 사찰을 건립했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중기 이후에는 법으로 사찰 건립이 금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관여하는 사찰은 계속된다.

헌릉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두 배나 많다. @이한영

특히 조선 초의 원찰은 능침사(陵寢寺)나 재궁(齋宮)으로 불렸다. 능침사에서 능(陵)은 왕이나 왕비가 묻힌 곳이고, 침(寢)은 왕과 왕비가 살아서 활동하던 생활공간이고, 사(寺)는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비는 왕릉 근처의 절이다. 또 재궁은 능이나 묘를 수호하고 제주가 재계를 위해 산소 아래에 지은 건물이다. 이같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찰, 즉 능침사는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돕고, 왕릉을 수호하는 기능이 있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인 1392년 8월 8일 태조의 사대(四代) 선조의 능에 제사를 지내고 능호를 올렸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동북면에서 제사와 능호를 올리는 일을 주관했다. 태종은 두 달 후에 다시 동북면으로 달려가 각 능마다 능지기(陵直)와  권무(權務), 수릉호(守陵戶)를 임명하고 재궁(齋宮)을 건축했다. 재궁에는 승려가 상주했다.

조선 최초의 왕릉은 신덕왕후 강씨를 모신 정릉이다. 1396년 승하한 왕비는 1397년 1월에 한성부 북쪽에 안장됐다. 태조는 정릉을 도성 안에 조성한 뒤 인근에 흥천사를 창건했다. 170여 칸의 흥천사는 신덕왕후의 소상(小祥)에 맞춰 건립됐다. 특히 흥천사의 대표 전각인 사리전은 3층 건물로 호화롭게 단장됐다.

태종의 제향 때 전사관과 능사관이 탕과 면을 들고 정자각으로 오르고 있다. @이한영

태조의 첫째 왕비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에 세상을 떴다. 신의왕후는 태조 때 왕비로 추존되고, 정종 때 시호를 받는다. 태종은 정종과 함께 태조 생전에 15차례나 제릉을 참배한다. 제릉의 원찰인 연경사는 정종 1년(1399)에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해 한식에 정종이 제릉에 제사를 지냈고, 승려들이 재궁을 수리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즉위 4년에 제릉 신도비를 건립하고, 8년에는 노비 20구를 추가 배정하고, 다음 해에는 토지 100결을 하사한다. 9년에는 대대적인 중창공사를 한다.

태조의 유택은 건원릉이다. 태종은 부왕을 위해 충청도 강원도 풍해도에서 군사 6000여명을 동원해 경기도 구리에 능을 조성했다. 산릉공사가 끝난 뒤 능 남쪽에 재궁을 설치하고 개경사로 이름 했다. 개경사는 능침사 역할과 함께 왕실 도량으로 활용됐다. 세종은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와병중인 원경왕후를 모시고 개경사로 피병했다. 또 태종의 탄신일에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태종의 잠저시절 고려 과거시험 합격 동기들이 해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한 것이다.

탕과 면을 대축관에게 전한 전사관과 능사관이 정자각에서 내려오고 있다. @이한영

정종은 개경의 후릉에 모셔졌다. 정종 보다 정안왕후가 7년 전에 승하했다. 이에 후릉 조영은 정종이 주도한다. 후릉의 능침사인 흥교사는 개경의 동쪽인 백련산에 위치한다. 정종은 후릉이 완공되자 흥교사에서 왕후를 추모하는 법석을 열었다.

조선 초의 능침사는 모두 국왕이 효도 차원에서 주도했다. 또 능역 안에 조성됐다. 능에서 거리가 200~300보 안에 위치했다. 특히 흥천사, 연경사, 개경사, 흥교사는 모두 재궁으로 불렸다. 재궁 명칭은 선왕 추모시설 의미보다 왕릉의 부속시설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지만 능침사가 단순히 왕릉의 제사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지는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탁효정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식 재궁은 조선 중후기에 나타나는 능침사와는 달리 왕릉제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능제 외에도 별도의 불교식 천도의식과 수륙재를 실행하는 기능도 했다.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건원릉과 모후인 신의왕후 제릉의 원찰 건립에 적극성을 보인다. 또 형인 정종의 후릉 능침사 조영에도 긍정적이다. 유학자인 태종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불교 속의 구복 신앙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 국가 정책으로도 강력한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부형의 왕릉 능침사에 대해서는 극히 호의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이는 불교를 멀리하지만 부왕과 모후, 형 등을 위한 효도 행위로 생각한 덕분이다. 불교의 영험함에 대해 손을 내저었던 태종은 자신의 능에는 능침사를 세우지 말도록 한다.

세종실록 2년 7월 11일 기사에 태종의 생각이 잘 나타난다. 태종은 원경왕후의 능을 수호하는 사찰 조성 여부를 세종에게 묻는다.

"능침(陵寢) 곁에 절을 짓는 것은 고려 태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에서도 개경사와 연경사를 건립했다. 이제 대비(원경왕후) 능침에도 사찰 건립 여부를 생각해야 한다. 창건 여부의 판단을 신하들에게 물어보라. 만일 창건이 대세라면 건축 비용은 나의 사재로 하겠다. 만일 신하들이 상왕(태종)의 뜻은 물으면, ‘상왕은 절을 짓지 않고 법석(法席)의 회(會)도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법을 세우려 한다’고 대답하라."

세종은 ‘불씨(佛氏)의 거짓은 알고 있다’며 부왕의 불교 비판에 긍정한다. 다만 능에 모후를 모신 뒤의 쓸쓸함이 절을 짓고 선량한 승려가 정성을 다하면 위로될 것이라며 에둘러 창건 속내를 밝혔다. 세종의 간절한 마음을 읽은 허조와 박은, 이원은 능침사 건설을 찬성한다.

그러나 유정현이 홀로 반대한다. 자신이 병든 가족을 위해 성심으로 기도했지만 효험이 없었음을 예로 들며 무용론을 제기한다. 특히 원경왕후의 투병 때 세종과 왕실가족이 지극정성을 다했으나 좋은 응답이 없었던 점도 불도를 믿지 못할 바라고 했다. 절을 세워서 명복을 비는 것은 단지 신하들의 아첨 행위로 치부하며 능침사 금지를 만세의 법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태종은 세종과 신하들의 생각에 접한 뒤 결론을 내린다.

"내가 주상의 안타까운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산릉에는 내가 묻힌다. 이제 영혼이 맑은 승려를 모아 불도를 열 수는 있다. 그러나 먼 훗날에도 가능한 일은 아니다. 깨끗하지 못한 승려가 내 영혼을 지킨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건원릉과 제릉에 절을 지은 것은 태조의 뜻을 이룬 것이다. 최근 개경사에 종을 새로 만들어 달았으나 내 마음은 아니다. 이제 산릉은 법을 세워서 후사(後嗣)에게 보인다. 만세 후에도 따름 여부는 자손에게 달려있다. 유정현의 의견처럼 왕릉에 절을 세우지 말라."

 이상주

왕실 전문 역사작가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사직 왕릉 제향 전수자다. 주요 저서로는 태조와 건원릉(문화재청), 태종과 헌릉(문화재청), 조선의 혼, 백강에 흐르다(부여군), 세종대왕 자녀교육법(다음생각), 세종의 공부(다음생각),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다음생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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