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논객칼럼=김희태]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자!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는 삼국시대의 명장이자 삼한일통(三韓一統, 혹은 일통삼한)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탄생지 및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보통 김유신을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경주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 김유신의 옛 집터인 재매정(財買井)과 김유신 묘(사적 제21호) 등 김유신과 관련한 흔적들을 경주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뜬금없이 충북 진천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고 이야기 했을 때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일면 이해가 간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문화재를 바라볼 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즉 김유신의 태실이 진천에 있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유신의 출신과 가계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 김유신의 태실이 진천에 있는 이유는?

삼국시대의 인물 가운데 김유신은 단연 특별한 존재다. 이는 김유신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쉽게 수긍이 되는데, 『삼국사기』 열전 가운데 대부분의 기록이 바로 김유신에 관한 것이다. 또한 기록만 보면 오히려 본기에 있는 왕들보다 더 기록이 많고 상세할 정도다. 김유신은 신라 역사상 최초로 신하이면서 왕이 된 경우로, 김유신 열전을 보면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김유신의 근본은 금관가야로, 『삼국사기』를 보면 532년(=법흥왕 19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노종(奴宗)과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항복했다. 이에 법흥왕은 구형왕에게 상등(上等)의 작위와 함께 현 김해시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은 김무력으로, 벼슬이 각간(角干, 이벌찬)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에 있어 각간의 지위는 오직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진천 김유신 태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태령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산청 傳 구형왕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희태

이는 신라에 항복한 가야의 왕족들이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김무력은 진흥왕 때 영토 확장 과정에서 핵심적인 장군으로 활약했다. 실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단양신라적성비> 등에서 김무력의 이름이 확인되며, 백제와의 중요한 일전인 관산성 전투에도 참전, 공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새롭게 개척된 신주(新州)의 초대 군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는 김무력의 아들인 김서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서현은 당시 국경이자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만노군(萬弩郡, 현 진천)의 태수를 지냈고, 훗날 백제와의 일전(一戰)인 낭비성 전투(629)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김유신의 태실이 충북 진천의 태령산에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유신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만명부인(=만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지금도 태령산 일대에는 김유신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담안밭이 남아 있다. 담안밭은 김유신 태어난 장소에 큰 담이 쳐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단양신라적성비, 김무력의 이름이 확인된다. @김희태
담안밭, 큰 담이 쳐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김유신은 만노군 태수로 있던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희태
김유신 탄생지 인근에 있는 연보정(蓮寶井), 당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김희태

탄생지와 태령산 일대에는 당시에 식수로 사용하던 연보정(蓮寶井)과 태령산 정상에 김유신의 태실이 남아 있다. 또한 김유신의 태실은 현재까지 확인된 태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비롯해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진천현 등의 많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태령산(胎靈山)의 이름 역시 김유신의 태실이 있어 불리게 된 지명으로, 외형상 태실비와 태함 등의 석물이 있는 조선의 태실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김유신의 태실 아래 멀지 않은 곳에는 태령산성으로 전하는 돌담이 있는데, 크기와 형태는 보루(堡壘)와 유사하며, 지난 1999년 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은 사적 제414호로 승격되었다.

■ 김유신은 왜 말목을 잘랐을까?

보통의 경우 김유신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해당 구절은 바로 “말목 자른 김유신”이다.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편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김유신과 천관녀는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는데, 어머니인 만명부인의 꾸짖음에 김유신은 더 이상 천관녀를 만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유신이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평소처럼 천관녀의 집 앞으로 가자 이에 김유신이 말목을 잘랐다는 요지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왜 말목을 잘라야 했던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둘의 사랑에 제동을 건 만명부인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만명부인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다.

경주 천관사지. 김유신과 천관녀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희태
울주 천전리 각석. 원명과 추명을 통해 당시 신라 왕실의 근친혼을 엿볼 수 있다. @김희태

여기서 주목해볼 부분은 바로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원명(=을사명, 525)과 추명(=기미명, 539)으로, 원명의 경우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 사탁부 갈문왕 沙喙部 葛文王)이 등장한다. 그는 법흥왕(=모즉지매금왕, 무즉지 另卽知)의 동생으로, 사부지갈문왕은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원명은 이들이 함께 천전리 계곡으로 놀러 왔다가 새긴 명문으로,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의 관계는 우매(友妹), 즉 벗과 같은 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원명 옆에 새겨진 추명(기미명,539)에서는 사부지갈문왕의 아내로 등장하는 인물이 어사추여랑이 아닌 지몰시혜비(=지소부인)이다.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는 법흥왕의 왕비인 부걸지비(夫乞支妃, 보도부인)와 아들인 삼맥종(=심□부지, 深□夫知)을 데리고 천전리 계곡을 찾아 추명을 남겼다.

경주 傳 진흥왕릉, 천전리 각석 속에 등장하는 삼맥종으로,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왕이다. @김희태

지몰시혜비는 법흥왕의 딸로, 사부지갈문왕은 자신의 조카와 혼인한 셈인데, 이른바 근친혼이었다. 지금이야 근친혼은 죄악시되는 분위기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씨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근친혼이 성행했다. 특히 이 시기 신라의 경우 왕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골이어야만 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여자임에도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성골의 신분이었기에 가능했다. 성골의 범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대체로 성골과 성골이 혼인해 낳은 자녀의 경우 성골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법흥왕은 후사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성골의 신분인 사부지갈문왕과 지몰시혜비의 혼인은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성골의 지위를 가지게 되며, 차기 왕위의 유력한 후보가 되는 것이다. 실제 사부지갈문왕과 지몰시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삼맥종으로, 삼맥종은 훗날 신라의 전성기를 연 진흥왕이었다.

김유신 탄생지에 복원된 김유신 생가. @김희태

한편 만명부인과 김서현의 혼인 과정 역시 순탄치가 않았는데, 이유는 신분의 차이였다. 표면적으로는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서현의 가문은 신분상으로 진골로 편입되었지만, 실제로는 가야 출신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랬기에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공적이 필요했고, 그 결과 김무력이나 김서현, 김유신까지 모두 신라의 장군이 되어 영토의 확장 및 국경의 최전선에 활약했다. 그런데 만명부인의 경우는 신분이 훨씬 더 높았는데, 만명부인의 가계를 보면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숙흘종(肅訖宗)-만명부인’으로 이어졌다. 숙흘종이 진흥왕의 동생이었다는 점에서 만명부인 역시 성골의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선 지몰시혜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성골의 혼인은 왕위 계승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만명부인이 진골, 그것도 가야 출신인 김서현과 혼인하겠다고 하니, 이들을 바라보는 인식은 야합(野合)이자 스캔들이었고,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김유신의 옛 집터인 재매정(財買井).  천관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경주 김유신 묘. 태실로 출발해 경주까지 이어진 김유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김희태

아니나 다를까 만명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반대를 넘어 아예 만명을 집안에 가두면서까지 이를 저지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만명은 기어이 김서현을 따라나서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그 결과 만명은 만노군으로 갈 수 있었고, 이곳에서 김유신이 태어났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한편 천관녀의 신분에 대해 기녀(=기생)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에도 김유신의 신분과 비교했을 때 천관녀의 신분이 낮았고, 당시 김유신과 천관녀의 관계는 만명부인이 아닌 누구라도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즉 둘의 만남이 장차 큰일을 해야 했던 김유신의 앞길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던 만명부인의 강한 반대를 접한 김유신이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말목 자른 김유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의 태실이 왜 진천에 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 그 이유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벤 일화를 통해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를 접근할 때 외형의 화려함만이 아닌 문화재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함께 주목하는 것도 좋은 접근 방법이 될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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