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따뜻한 생각]

[청년칼럼=김연수]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집 마련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왜 최선을 다하는데 좀처럼 풍요롭지 못할까.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이사가 존리가 출연해 화제가 됐다. 존리, 주식 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는 부자의 정의를 “돈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꼭 물질이 넘치도록 많지 않아도 돈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그것 역시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큰돈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기부하는 사람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유보다는 나눔이 더 큰 선순환을 만들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외적 과시를 위해 소비하곤 한다. 미래, 자기계발을 위한 투자가 더 의미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처럼 보이기 위한 소비를 멈추기란 쉽지 않다. 나아가 존리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로 ‘사교육비, 자동차, 명품’을 꼽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교육비가 가장 공감이 되었다.

픽사베이

지나친 사교육 또한 좋은 대학 타이틀을 손에 쥐기 위한 욕심, 학벌 과시욕 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교육열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한국 사회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특히 대부분의 맞벌이 부부는 자녀의 공부에 신경을 쏟지 못할 경우 여러 학원을 등록해 그 공백을 채우려 한다. 단순한 국어, 영어, 수학 등 교과목 사교육비 외에도 아이의 진로와 관련된 사교육비가 만만치 않다.

특히 체육, 미술, 음악과 같은 예체능 계열은 운동용품, 미술 재료, 악기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한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이와 같은 사교육비를 감당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나 또한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사교육의 힘을 빌린 시절이 있었다. 음악이나 미술은 기초가 중요하고 각 세부 분야에 따른 기교,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원을 다니는 게 꽤 보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글을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생소한 일이다. 그래도 난 부족한 내신 성적을 수상실적으로 대체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학원에 다녔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교육비는 상당했고 부모님의 지원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드려야 한다는 스트레스 또한 엄청났다.

대학 입학 이후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문예 창작 입시 학원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중 한 곳은 학원의 지도로 학원생이 대회에서 수상할 경우 받은 상금의 절반을 학원에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꽤 충격적이었고 참 이상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문학인, 시인, 작가가 아니라 그저 장사꾼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대학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 선배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실기 지도 과외를 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기 전형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입학했다고 한들 과연 10대의 입시에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대학을 채 졸업하지도 않았으며 등단은커녕 문학상 한 번 탄 적 없는 이들이 아이들의 글쓰기를 지도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몇은 감정노동을 하며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만만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훨씬 낫다며 내게 과외를 권하고 종용하기도 했다.

수업마다, 자소서마다 값을 매기던 학원 선생님들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10대에겐 너무나 크고 중요한 대학 입시를 맡는 자세라기엔 무책임해 보였다. 어리다고 꿈이 작을 리 없지 않은가. 요즘도, 대학 이름을 내세워 과외를 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부디 자신이 고군분투했던 대학 입시 시절을 돌아보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이런 종류의 예체능 계열이 과연 사교육으로 교육할 수 있고 또 점수를 매기는 게 합당하고 공정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난 소설을 쓰고자 했지만, 감성이 좋다는 말에 시로 전공을 바꿔야 했다. 뒤이어 시에 감정이 짙다는 지적에 주야장천 묘사만 연습하던 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쓰고자 하는 글이 무엇인지 방향성을 잃었고 회의감에 빠진 순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을 타고자 주최 측에 맞게 작품을 수정하고 지도 교수님의 취향에 맞게 글을 쓰는 나 자신과 직면하게 됐다. 그만큼 서글픈 일은 없었다. 이는 물질적인 가난을 넘어서 생각을 가난하게 만드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정해진 규정이 없는 분야답게 더 자유롭고 자신의 색깔을 담아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을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더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고 건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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