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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흘린 ‘팥죽같이 검은 땀’[김부복의 고구려POWER 41]
김부복 | 승인 2020.06.16 11:00

[논객칼럼=김부복]

1124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외모’를 “체구가 크고 얼굴이 검고 눈동자가 불룩한 모습”이라고 적었다. 사신은 그러면서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많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학자로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알다시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책임자다.

그러나 김부식은 자신의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 그 바람에 사신의 기록과 달리 존경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윤관(尹瓘)은 북방민족을 여러 차례 다스린 명장이었다. 여진족이 ‘금나라’라는 대국을 세우고도 감히 고려를 넘볼 수 없도록 만든 공신이었다. 김부식이 하급관리였을 때 최고로 높은 자리에 있던 ‘고위공무원’이기도 했다.

픽사베이

어느 날, 예종(睿宗) 임금이 윤관에게 지시했다. 임금의 숙부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문을 작성하라는 지시였다.

문무 양쪽에 걸쳐 이름이 높던 윤관이었다. 곧 아름다운 비문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젊은 김부식은 안하무인이었다. ‘대선배’인 윤관이 쓴 비문을 보더니 대뜸 시비를 걸었다.

“아무렇게나 쓴 문장이다.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김부식의 비판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은 김부식을 불렀다. 비문을 새로 작성해보라고 지시했다.

이쯤 되었으면 김부식은 물러섰어야 했다. 대선배의 글에 시비를 건 것부터가 실수였다. 임금이 다시 작성해보라고 지시했더라도 사양했어야 좋았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윤관의 글을 뜯어고쳤다.

이렇게 무례했다. 김부식은 이 ‘사건’ 때문에 낙인이 찍혀야 했다.

세월이 흘러 윤관은 사망하고, 윤관의 아들 윤언이(尹彦頤)가 뒤를 이었다. 윤언이 역시 부친을 닮아 출중한 공무원이었다. 윤언이는 국자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임금이 국자감에 행차하더니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의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김부식의 실력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주역만큼은 미흡했다. 전공이 아니었다. 김부식은 떠듬거려야 했다. 강의내용이 ‘별로’였다.

임금은 배석하고 있던 윤언이에게 김부식의 강의에 대한 질문을 하도록 했다. 윤언이는 기다렸다는 듯 김부식의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졌다.

김부식은 당황했다. 윤언이의 논조에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얼굴에 ‘팥죽같이 검은 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윤언이는 부친이 수모를 당했던 ‘과거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통쾌한 보복이었다.

김부식은 명문 귀족 출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면서도 정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135년, 묘청(妙淸)이 이른바 ‘묘청의 난’을 일으켰을 때에는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먼저 제거해버렸다. 윤관에게 대든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김부식은 그러고도 77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김부식의 공(功)은 ‘삼국사기’ 편찬이다. 고구려의 유기(留記) 등 다른 역사 기록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삼국사기’가 남아 있는 게 ‘공’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過)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과’는 어쩌면 반드시 후세에 전했어야 할 고구려의 ‘영웅’을 빠뜨린 점이라고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아쉬워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姜以式) 3자(字)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이는 수서(隋書)만을 초록(抄錄)한 문자인 까닭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薩水)전쟁의 병마도원수라 하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臨楡關)전쟁의 병마원수라 하여 양서(兩書)가 부동(不同)하다.…”

강이식은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모욕적인 국서’를 보냈을 때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글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고 주장한 명장이었다. ‘이검가답(以劍可答)’으로 본때를 보이자며 수나라 30만 침략군을 전멸시킨 명장이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강이식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강이식뿐 아니다. ‘안시성 싸움’에서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군사를 궤멸시킨 ‘양만춘’ 장군도 없다.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철수할 때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하니까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는 희한한 얘기만 들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양만춘을 한자로 ‘楊萬春, 梁萬春’이라고 헷갈리고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또 어떤가. 김부식은 ‘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서도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을지문덕의 ‘을지’가 선비족인 ‘울지’씨라는 주장까지 나오도록 만들고 말았다.

신채호는 1908년 ‘을지문덕’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다행이도다, 을지문덕이여. 몇 줄의 역사가 남아 있도다. 불행이어라, 을지문덕이여, 어찌 서너 줄의 역사밖에는 남지 않았는가.”

김부식은 집안 전체가 ‘사대주의’에 온통 빠져 있었다. 김부식의 동생 김부의(金富儀)를 보면 알 수 있다.

“금나라가 새로 요나라를 격파하고 사신을 보내 형제 맺기를 청하였다. 대신들은 격렬하게 안 된다고 말하고, 그 사신을 목 베어 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다. 김부의가 홀로 상소하여… ‘오랑캐 나라에 굴복하여 섬기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좋은 계책입니다. …왕께서는 길고 멀리 내다보는 계책을 생각하셔서 국가를 보존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했다. 재추(宰樞)들이 모두 비웃고 또 배척하였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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