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서석화의 참말전송
일몰은 해 혼자 만드는 게 아니더라[서석화의 참말 전송]
서석화 | 승인 2020.06.23 15:40

[논객칼럼=서석화]

죽전에 온 후론 일몰을 자주 본다. 그 시간에 탄천을 걷는 게 습관이 된 후에 얻어진 선물이다. 물이 흐르는 길 양쪽으로 길게 군락을 이루며 서 있는 버드나무와, 싱싱한 물살이 가장 조용해지는 시간.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처럼 자태 고운 두루미의 비행도 멈추고, 천연덕스럽게 떠다니던 청둥오리 무리도 물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이파리들 속으로 숨는 시간. 이름은 모르지만 어른 종아리 굵기와 길이는 거뜬히 될 것 같은 물고기들도 모래를 들추며 물살 아래로 낮게 가라앉는 시간. 그리고 개나리가 물꼬를 튼 봄부터 하늘이 좁을 만큼 각 구간마다 피어 있는 꽃들도 몸을 접는 시간. 보고도 안 믿어지고 지금도 내가 진짜 본 게 맞나 하고 탄천을 걸을 때면 눈과 머리와 가슴이 자꾸 총동원되는 탄천 풍경이다.

픽사베이

해만 지는 게 일몰이라 생각했었다. 때 되면 일어나서 밥 먹고 일하다 잠에 드는 것처럼 일출도 일몰도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 풍경으로만 생각했다. 쌓인 어둠을 걷어내고 떠오르는 게 일출이듯이, 열기를 걷어내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게 일몰이라고 말이다. 당연히 일출과 일몰을 말할 때 모든 건 ‘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노을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날도, 그 아름다움이 너무 깊어 기어코 눈물이 터질 때도 몰랐었다. 햇살은 엷어지는데 붉은 너울의 두께를 불리며 부풀어 오르던 구름을 볼 때도 몰랐었다. 그저 저녁이 오고 있구나... 오늘 하루도 이제 ‘어제’가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면서 모든 ‘끝’은 참 극적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탄천을 걸으며 보았다. 죽전으로 이사 온 지 육 개월 째, 낯섦과 막막함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걷기 시작한 탄천 산책로에서 말이다. 이마가 빙판처럼 매끄럽게 어는 것 같았던 지난 겨울, 처음으로 일몰 사진을 찍으며 아마 나는 울었던 것 같다. 내가 걷기 시작하는 죽전교부터 대지교와 오리교와 구미교를 거쳐 미금교, 터닝 지점인 돌마교, 컨디션이 좋아 좀 더 멀리 가는 날이면 불정교를 지나 금곡교까지 젖어들던 일몰의 해. 그 젖음이 너무 매끄러워, 그 젖음이 너무 순리 같아 숨조차 참으며 나는 집중했었다.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묵직하다는 것도, 감동이야말로 진짜 눈물의 길을 터주는 것이란 것도 그날 알게 됐다. 유체 이탈된 사람처럼 그날 나는 분명 비현실적인 시간과 만났다.

픽사베이

일몰은 해 혼자 지는 게 아니었다. 온 세상과 사라짐을 함께 겪는 게 일몰이었다.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은 애틋하다. 애틋해서 특별한 게 된다. 새벽에 떠올라 하루 동안의 순결한 노동으로 소임을 다한 해의 마지막은 눈부셨다. 허공과 구름과 바람 같은 자연이 해 주위로 도열하고, 건물과 다리와 도로와 사람들이 숨죽인 채 해의 마지막 숨을 함께 쉰다. 그것이 일몰이었다. 하늘이 하루 중 가장 뜨겁게 요동치는 시간! 어디 하늘뿐인가. 만상(萬象)이 가장 예민한 촉수로 첨탑 같은 엑스터시에 젖는 시간! 하루가 뜨거웠을 수록, 땅 끝까지 뻗칠 만큼 햇살이 길었을 수록, 일몰은 진하고 분명하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사실 해가 진후에도 졌음을 모르지 않는가.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새벽이 먼 사막을 종단하는 것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두려움과 막막함과 온몸의 모공이 막힐 만큼 대치해야 할 수도 있다. 스쳤던 모든 게 신기루 같아 자신의 그림자조차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해야 하는 수고가 멈춰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항하는 자신의 의지가 치열했을 수록 삶에 대한 경외심이 선물처럼 찾아온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온 세상이 그를 도와 눈부신 일몰 같은 노년과 죽음을 갖게 하지 않겠는가. 비 오거나 흐린 날 같은 생의 허술한 지점은 누구든 갖고 있는 구간이다. 거기에 주저앉아 멈춘다면 인생의 아름다운 일몰은 없을 것이다.

픽사베이

오늘도 일몰의 시간에 나는 탄천에 있다. 구름 한 점 없던 쨍한 대낮이 밀려난 저녁, 눈동자를 한껏 넓혀 바라보는 하늘에 붉은 접시 같은 해가 선명한 자태로 떠 있다. 카메라로 해를 당기니 돌마교 아래 흐르는 물살 위로 꼭 같은 해가 내려온다.

죽전에 와서 처음 보는 풍경이 자꾸 생긴다. 어디선가 해가 진다면 잠시 가던 걸음과 부산했던 마음을 멈춰보라. 일몰에 혼자 있다고 외로웠는가. 온 우주가 지는 해를 돕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게 되리라. 열심히 살아온 당신이 지나고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살고 나이 들어가는 시간, 당신은 혼자 늙는 게 아니다.

 서석화

  시인, 소설가 /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회원/한국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 <종이 슬리퍼>/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이별과 이별할 때>/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전 2권) 등 다수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석화  shiren7@naver.com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석화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매체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논객닷컴 | (03163)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2, 대일빌딩 1108호
대표전화 : 070-7728-8569 | 팩스 : 02-722-65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종국
제호: 논객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78 | 등록일 2011년 9월 27일 | 발행일: 2011년 10월 1일 | 발행ㆍ편집인 : 권혁찬
Copyright © 2020 논객닷컴.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