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현의 사소한 시선]

[청년칼럼=양재현]

색깔, 혈액형, 그리고 MBTI: 우리를 설명하는 것들.

어릴 적,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늘 파란색이라 답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학용품이나 옷, 장난감에는 파란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파란색을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파란색을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고 답하게 된 것에는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XXX 차밍 교실” 따위의 책에는 꼭 색깔에 대한 챕터가 하나씩은 들어가 있었고, 좋아하는 색깔에 따른 성격이 소개되곤 했다. 거기에 따르자면, 파란색을 좋아하는 소녀는 “짝사랑을 많이 하지만 연기를 잘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게 내 취향을 저격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성격이 나의 성격이 되기를 바랐고, 그날부터 내가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 되었다. 이는 훗날 H.O.T.의 팬이 되어서 H.O.T.의 상징색인 하얀색을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삼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료사진 @오피니언타임스

조금 자란 뒤에는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혈액형이었다.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갈린다는 것이었다. 내 혈액형은 대한민국 인구의 70%가 가지고 있다는 A형이었고, A형의 특징은 단 한 단어로 귀결될 수 있다. 소심.

나름 과학을 지향했던 나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게 다 있냐고 반문했었지만, 이내 혈액형 성격론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그 용례는 다음과 같았다. “만나서 반가워. 참고로 나는 A형이라 되게 소심하니까, 좀 답답해도 이해해 줘.” 첫 만남에서 “나 소심하니 조심해라”라고 하는 것은 나 사회성 없는 사람이라며 동네방네 광고하는 거만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었다. 그에 비해, “A형이라 소심하다”고 말하는 건 적절히 위트 있으면서도 세련된, 센스 있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A형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소심하고 사교성이 떨어졌던 나는, 이성으로는 부정하는 혈액형 성격론을 받아들이면서 나의 약점을 나름 커버할 수 있었다.

여전히 소심하고 사교성이 그닥 늘지 않은 요즘의 나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 바로 MBTI 다. 어떤 모임에 나갔을 때 “저는 INTP에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 어쩐지!”라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신기하게도 그 다음부터는 내가 조금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쿠션어 없이 돌직구를 날려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대체 그것이 나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대체 어떤 원리로 이뤄지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들을 꽤나 유용하게 쓰고 있다.

너무나 어려운 우리들의 과제, 자기소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첫 시간에 늘 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소개다. 많은 것을 바라진 않는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 그 외 소개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이 아이들에겐 넘기 어려운 큰 산인 모양이다. 자기소개를 시작도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일 년에 꼭 한 명씩은 나오곤 한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찬 고등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 체면이라는 것을 익힌 나이인 만큼 울거나 하지는 않지만,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며, 말을 더듬더듬 거리는 친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오면 자기소개를 할 일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런데 그 즈음이면 우리가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외국에서는 자기소개 할 때 소속, 나이 같은 거 안 밝혀!” 아무리 외국은 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라고 생각해 봐도, 이런 말을 한 번 들은 이상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름 자기소개 할 때, 학교, 전공, 나이 등을 빼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학교와 전공, 나이를 빼면 이름 밖에 말할 게 없다는 걸.

자기소개가 본격적인 난이도를 자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취업의 문턱에 들어서면서다. 지원하는 회사마다 앞뒤 다 자르고 자기소개를 해보라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할 말은 없고, 글자 수는 채워야겠고. 결국 자기소개는 태몽부터 부모님 이야기, 학창 시절 무용담까지 하나의 일대기로 구성되며 ‘자소설’로 변질되고 만다.

그냥 나를 소개할 뿐인 자기소개. 우리는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 타인과 관계의 첫 단추 끼우기 전략

밀레니얼 세대가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로 우리는 인간관계를 꼽고는 한다. 서로 약속하고, 충돌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상대를 살피며 배려하는 이 모든 인간관계의 과정은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수학 방정식보다 더 어려운 난제이자, 큰 부담이다. 그러다보니 밀레니얼 세대가 추구하는 인간관계는 자기중심적인, 깊지 않고 적당히 얕은, 끈끈하기 보다는 느슨한 연대가 이뤄지는 관계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자기소개를 어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처음 건네는 자기소개는 향후 저 사람과 맺을 관계의 방향과 깊이를 정하는 첫 단추나 다름없다. 자칫하면 버릇없어 보이고, 자칫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저 사람 앞에서 내 성격을 모두 죽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라는 사람을 상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줄 언어가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지금, MBTI가 열풍인 것에는 수많은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엔 MBTI가 밈으로 소비되면서, 기존 심리검사의 맥락을 떠나 그저 재미있는 유행어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양한 맥락 속에서도 공유되는 한 가지가 있다.바로 MBTI는 나를 규정하는 관념적 틀이자,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개념적 용어라는 것이다.

유행을 넘어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는 MBTI가 우리사회에 독이 될지 득이 될지, 장담할 수는 없다. 남발되는 MBTI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가 겪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 속에서, MBTI라는 개념이 그를 조금이라도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보조아이템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MBTI 열풍은 밀레니얼 세대가 찾아낸 나름의 관계 맺기 전략일지도 모른다.

일단, 나는 매우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양재현

사소해 내놓지 못했던 시선.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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