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최근에 한 기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떨어질텐데...” 청년들 취업의 꿈 접었다’(동아일보)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였다. 9번째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에 지원하고 잠시 짬이 났던 차여서 나는 무심코 기사를 클릭했다.

기자는 구직 적령기에 든 청년층에서 구직을 포기한 이른바 ‘비구직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 자료를 들며 청년 실업 문제의 심각함을 강변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비구직 니트족 청년의 숫자는 2015년에 비해 10.4%가량 상승해 있었다.

기자가 인터뷰한 30대 구직자 A씨는 “채용공고가 뜨면 어차피 떨어질 텐데 뭐 하러 원서를 쓰는지 모르겠단 생각만 든다. 일상에서도 아무런 의욕이 없다”며 월세방을 빼 냑향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먼저 취업해 돈을 벌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자괴감만 든다고도 했다. 청년실업 문제의 장기화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기사는 마무리됐다.

픽사베이

나 역시 경력이라고는 6개월 간의 언론사 인턴 기자가 전부인 구직자였고, 최근 몇달간 취업은커녕 식당 홀서빙 아르바이트에도 붙어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코로나19 여파의 부침을 겪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하는 걸 보면 내가 정말 잘못 살았나보다 가끔 자괴했고, 백지 자기소개서 위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보면 지겨움에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기사 창을 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해, 취업해야 된다는 건 아는데 웬지 시도조차 하기가 싫어”

작년 이맘때, 구직 사이트를 들여보고 있다던 친구는 갑작스레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내왔다. 집이 부유하긴커녕 내가 아는 한 학교를 졸업하고 단 한번도 아르바이트를 멈춰본 적 없는 친구였다.

이유를 묻는 내게 친구는 전화를 걸어와 이런 말을 했다. 취업하면 이제 정말 어른의 삶이 시작되는 거잖아. 맨날 만나면 할말이라곤 미친 상사 뒷담화에, 야근의 피곤함에, 아무리 애써도 모아지지 않는 적금에... 그런 것들.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 친구의 목소리가, 구직을 포기한 청년 구직자들의 사연에서 빠진 부분을 찾던 내게 일말의 깨달음을 줬다. 우리는 행복한 직장인을 본 적이 없던 것이다.

‘회사 생활은 어때?’라는 뻔한 질문에 ‘행복하다’고 자신했던 친구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적저럭 만족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던 친구가 2~3명 정도. 나머지는 하나같이 현재 다니는 회사의 개같음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곤 했었다. 마치 그 많은 친구들이 한 회사에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몇은 입을 함부로 놀리는 상사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쏟았고, 또 몇몇은 이거라도 마셔야 버티겠다며 식은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또 두엇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정신과에 다녀온 사실을 고백했다. 회사 앨리베이터를 탔는데 숨이 턱 막히며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던 친구의 얼굴이 태연해서 나는 위로를 해야할지, 화제를 바꿔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한 손으로 술 잘만 받던 동생은 취업한 이후부터 내가 술병을 들면 화들짝 놀라 두손으로 소주잔을 들고 공손히 술을 받으려다 민망하게 웃으며 한손을 내리곤 했다. 기어이 회사를 나와 외국으로 떠난 그는 SNS 배경화면에 ‘헬조선 탈출 D+000일’이라며 디데이 달력을 걸어놨다. 행복한 직장인을 떠올리는 건 그토록 어려웠건만, 불행한 직장인이 된 친구들을 떠올리기란 이토록 쉬웠다.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By. 미셸 투르니에

물론 취업이 천국으로 가는 입장권이라고 그 어떤 어른도 약속한 적 없었다. 미셸 투르니에의 말처럼 다들 어쩔 수 없이 그러고 사는 거라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배웠다. 하지만 우리 윗세대들은 최소한 ‘이것만 버티면’이라는 어미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발화할 만큼의 희망은 꿈꿀 수 있었다. 이것만 버티면 집을 살 수 있고, 이것만 버티면 결혼을 할 수 있고, 이것만 버티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최소한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 대체 누군들 취업이 하고 싶겠나. 아귀다툼 끝에 통과한 취업의 바늘 구멍 뒤에 기다리는 게 굵은 눈물과 식은 소주, 정신과 영수증이라면. 나는 취업은 해야 하지만 하기 싫다던 작년의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취업한 ‘어른’으로서 감당할 고난들이 두려워 청년들이 취업을 포기한다고 주장하고 싶은건 아니다. 몇몇 무례한 어른들의 말처처럼 ‘배가 불러서’ 취업을 포기할만큼 우리 세대는 팔자 좋지 못한 세대다. 다만, 행복한 직장인을 한번도 본 적 없다는 사실이, 청년들의 구직 포기를 부채질하고 1년 미만의 신규 퇴사자를 늘리는 내면의 암초로 작용하진 않을까 하는 혐의만은 가져본다. 이 노력을 해서 받을 대우가 저런 거라고? 하는 좌절감 말이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청년 실업 문제에 숨통이 트인 후에도 ‘행복한 직장인의 부재’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고민해가야 할 또 다른 과제가 아닐까.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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