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42]

[논객칼럼=김부복]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경주에서 왕릉급 고분을 발굴하던 학자들이 ‘청동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만세’를 불렀다.

항아리 밑바닥에 1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16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었다. 그 글자 가운데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이었다.

당시의 고분 발굴은 일본이 패망해서 자기 나라로 쫓겨난 뒤, 순전히 우리 기술로 시도된 첫 발굴사업이었다. 그 첫 발굴에서 일본이 눈에 불을 켜며 뒤지고도 발견할 수 없었던 광개토대왕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타났으니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아리에 새겨져 있는 ‘을묘년’은 광개토대왕 사후 3년인 서기 415년을 말하는 것이었다. 항아리는 광개토대왕을 모시던 사당에서 쓰던 제기로 추정되었다.

신라가 경주에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다.

항아리의 글자체는 광개토대왕 비문과 같은 ‘쌍구체’였다. 항아리가 발견된 고분은 ‘호우총’이 되었다.

많은 국민이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 생전에 왜구를 물리쳤던 광개토대왕이 우리 민족 앞에 나타나 일본을 몰아내도록 도와준 것이라며 기뻐했다. ‘민족의 영웅’이 다시 나타났으니 나라가 융성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2015년, 문화재청은 이 ‘호우’를 ‘보물 제1878호’로 지정하고 있었다. 2015년 9월 3일 ‘경향신문’ 보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청동 그릇은 1946년 경주의 은령총과 함께 발굴한 호우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광개토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일한 청동 그릇이다.… 그릇은 높이 19.4㎝, 배 부분 지름 24㎝로 밑바닥에는 제작 시기 등을 알려주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16자가 4행에 걸쳐 양각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십(十)’이라는 글자로 미루어 이 그릇이 10개 이상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릇은 단 한 개뿐이다.…”

1946년에 발견되었을 때 ‘만세’까지 부르며 감격했던 항아리 또는 그릇이었다. 그런데 세기가 바뀌고 2015년이 되어서야 ‘보물’로 지정되고 있었다. 자그마치 70년이나 지나서였다. 광개토대왕이 섭섭할 노릇이었다.

광개토대왕을 섭섭하게 만들 만한 ‘사건’은 또 있었다.

정부가 5만 원짜리 ‘고액권’을 찍어내겠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운 광개토대왕 초상’이 들어가야 한다는 여론이 간단치 않았다. 그러나 알다시피 광개토대왕의 초상은 ‘신사임당’에게 밀리고 말았다.

한국은행은 애당초 광개토대왕 초상을 ‘후보’에도 넣지 않았다고 했다. 그 바람에 네티즌이 발끈했다. ‘중국 눈치’ 때문에 ‘알아서’ 빠뜨린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지폐의 도안마저 남의 나라 눈치를 본다며 성토하기도 했다.

신사임당의 ‘사임당(師任堂)’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임당’은 ‘사대주의’ 냄새가 풍기는 이름이다. 그 사임당이 광개토대왕을 밀어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관련 '윤명철 교수'의 유튜브 동영상

광개토대왕비는 만주 벌판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윤명철 교수는 이렇게 썼다.

“높이가 6.39m로 3층 건물과 같다. 아랫변은 대체로 1.3m 정도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두꺼워져 솟구치는 형국이다. 꼭대기도 왼쪽이 더 높아 역동성을 또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거대함과 웅장미를 갖춘 부피만으로도 고구려가 강대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광개토대왕비의 ‘존재’ 자체를 헷갈리고 있었다. ‘용비어천가’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리쯤에 큰 벌판이 있다. 그 가운데에 옛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일컫는다. 성 북쪽으로 7리쯤에 비석이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아예 광개토대왕비를 군함에 실어서 자기 나라로 옮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왜구를 제압했던 광개토대왕은 하마터면 ‘왜구의 포로’가 될 뻔했다.

수모는 그치지 않고 있다. 조선 시대에 ‘남의 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여겼던 광개토대왕비가 이제는 ‘중화민족의 비석’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2017년 7월 10일 ‘동아일보’ 보도다.

“중국 정부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고구려 문화재 유적 안내판에 ‘광개토대왕비는 중화민족의 비석’이라고 최근 새로 기술한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불리는 해동 제일 고대 비석 즉 호태왕비(好太王碑)가 있고’… 안내판에는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이같이 해설해 놓았다.…”

광개토대왕릉도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2019년 5월 24일 ‘연합뉴스’ 보도다.

“광개토대왕릉 위로 돌계단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함부로 오르내리고, 장군총은 눈에 띄게 균형을 잃어 변형되는 등 보존상태가 문제 있다는 지적이다.… 확인한 결과 광개토대왕릉 곳곳이 허물어지는 등 원형 훼손이 심각한 상태였다.…”

광개토대왕릉에서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전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산악과 같이 굳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명문전이다. 못난 후손은 광개토대왕릉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지난 6월 26일부터 광개토대왕비를 ‘중화민족의 비석’이라고 잘못 표기된 안내판을 바로잡는 캠페인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좀 늦었지만, 반가웠다.

반크는 세계인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을 알리고 동북공정의 실체를 홍보하는 포스터를 제작하고 있다. 포스터에 ‘광개토대왕비는 한국 역사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는 고구려 시대 비석 예술의 진품’이라고 강조하면서, 주은래(周恩來) 전 중국 총리의 말을 추가했다고 한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이는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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