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이 바라보는 노동과 사회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사회란 것을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로 이해하기도 하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여서 산다. 가족이나 씨족이 그러하다. 마을을 이루고 집단을 만들어서 산다. 최근에는 가상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상호 소통하고 교류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렀다. 단지 모이는 형태나 방식이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집단을 중심으로 응집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내집단 편애’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특정한 가치나 이념을 공유하거나 특정한 조직을 갖추면 집단적 특성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기 집단에 대한 편애가 강해지고, 다른 집단을 타자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개인적으로 있을 때와는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는 현상은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라는 운동가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 연기 자욱한 교정을 휩쓸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지만 여러 급우들이 함께하니까 참여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그 속에 있으면서 더 자신 있게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다.

노조의 행사나 집회에서 참여자의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많은 노조원이 참여한다는 것은 노조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회사와의 힘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웅변하는 일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모이면 이러한 객관적인 힘의 관계 이외에 ‘다른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사람들이 집단화 되었을 때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이 분명히 형성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이를 ‘집단열광’이라고 불렀다. 축제나 종교의식에서 모인 사람들은 개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다. 집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개별 참가자의 합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다.

19세기로의 전환기에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한편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힘에 열광하였지만,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모인 사람들은 왕도 단두대로 보낸다.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벌인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이 집단화되면 이성을 잃고 집단 감정에 쉽게 휩쓸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근대의 위대한 발견인 ‘이성’이 군중 속에서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조직으로든 이념이나 가치로든 집단화될 경우에는 개인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음을 우리는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이 힘은 역사 발전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집단 광기로 나타나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 대열의 뜨거운 열기가 되는가 하면 독재자 집단이나 종교집단의 광기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통상 우리는 사회적 현상이나 사람들의 행위를 지극히 ‘이성’이라는 잣대로 보려고 한다. 계몽의 세례를 흠뻑 받아 온 우리들에게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잣대는 사회현상이나 사람들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집단화되어 있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을 더욱 그러하다.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지역별 싹쓸이 투표, 월드컵 경기에 열광하는 응원 대열, 그리고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들. 이를 ‘이성’이라는 잣대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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