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까치글방의 박종만 창립자가 최근 타계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그와 마주쳤던 내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떠올린다.

고인으로서도 출판사를 차리기 전이었으니, 40년도 훨씬 전의 기억이다. 그렇다고 접촉이 잦았던 것도 아니다. 기껏 두어 번이나 만났을까. 당시 그가 근무하던 뿌리깊은나무 잡지 원고 때문에 마주앉았다는 업무적인 성격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만남이었다. 스쳐간 인연은 짧았으되 수더분하면서도 고지식한 첫 인상의 여운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수도 별로 없는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얘기다. 내가 아직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불과 스물세 살의 천방지축 시절이었고, 고인도 갓 서른을 넘긴 한창 때였다. 그해 뿌리깊은나무 6월호에 내가 쓴 ‘화학조미료-미원과 미풍’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작성에 앞서 그 취지와 방향에 대한 논의를 위해 만난 자리였다. 편집 담당자와 기고자로서였다. 지금 서울역 맞은편의 동자동 시외버스 터미널 옆에 위치해 있던 잡지사 편집실에서의 만남이다. 뿌리깊은나무가 그보다 한 해 전인 1976년 3월 창간호를 내고 시중의 인기를 키워가던 무렵이었다.

@사진 까치글방 홈피 캡쳐

먼저 내가 기고했던 기사의 청탁과정과 내용에 대한 배경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뿌리깊은나무가 ‘이것도 문제다’라는 고정난을 마련해 고발성 기획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그 의뢰가 나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집필 방향이 논의된 단계에서 마침 다른 기사를 기고하려고 편집실에 들렀던 내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물론 현장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었다. 그때 편집진으로서도 검증이 채 안 된 애송이에게 집필을 맡긴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을 터다. 어쨌거나, 그런 과정을 거쳐 제목이 암시하듯 화학조미료에 중독된 우리 음식문화의 현실을 지적하는 기사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김치를 담글 때 조미료를 쓰고 그 김치로 찌개를 끓일 때도 또 조미료를 치는 식습관의 문제점을 따지는 글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내가 원고지로 50~60매 분량의 기사를 작성해 전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손에서 우리말 표현과 어법에 맞도록 다듬어지는 과정을 다시 거쳐야 했다. 며칠 뒤, 고쳐진 내용을 확인하려고 편집실에 들렀을 때 그가 내보인 것은 아예 타이프로 새로 쳐 넣은 원고였다. 결과적으로 잡지에 실린 기사는 나와 고인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비단 내 기사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교수나 평론가들이 쓴 다른 글들도 어김없이 편집자의 손길을 거쳐 재탄생하곤 했다. 그것이 뿌리깊은나무의 고집스런 편집 방침이었다. 고인에 대해 고지식하다는 인상이 깊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교정 작업의 결과일지 모른다.

더구나 이듬해에는 나도 정식으로 뿌리깊은나무에 입사해 비슷한 숙련의 길을 걷게 된다. 고인은 이미 퇴사해서 까치글방을 차린 뒤였고, 잡지사 편집실도 서울역 맞은편에서 신문로 한글회관으로 옮겨갔을 때였다. 그러나 나의 숙련 과정은 그렇게 원활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 초년병으로서 청춘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시국이 험난했던 만큼 정치·사회적인 불만과 불안도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핑계를 대더라도 고인이 내 원고를 다듬어 주었듯이 내게 맡겨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하기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타계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지면서 출판인으로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일반인들의 추모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800여종에 이르는 명저를 출판함으로써 전환기에 처한 목마른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보답일 것이다. 토머스 쿤, E H 카, 에리히 프롬, 스티븐 호킹 등의 저작들이 그의 손을 거쳐 독자들에게 전달됐을 테니 말이다. 아마 새 책을 낼 때마다 잡지사 시절의 투박한 원칙과 고지식한 장인 정신이 그대로 발휘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박종만은 그가 만든 책이 오자나 탈자, 또는 오역 때문에 독자의 지적을 받는 일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김형윤 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의 신문 추모사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고인과 부산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이 다닌 사이인데다 내가 ‘미원과 미풍’ 기사를 썼을 때 편집장이었고, 그 인연으로 나를 기자로 받아준 인생의 선배이기도 하다.

뿌리깊은나무 시절의 오랜 기억이 빛바랜 활동사진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은 내 사회생활의 첫 직장이었던 때문일 것이다. 그 인연이 됐던 첫 글을 다듬어 준 사람이 바로 박종만이었다. 고인의 편안한 영면을 빈다.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현)
 세계바둑교류협회 회장
 전경련 근무
 뿌리깊은나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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