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 조선왕릉, 그 유일한 이야기]

[논객칼럼=이상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안식처가 영릉(英陵)이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에 위치한다. 영릉은 당초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조영됐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이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모셔진 헌릉에 이웃해 있었다. 그런데 세종의 손자인 예종이 천장(遷葬)을 한다. 예종 1년(1469) 3월 6일에 경기도 여흥부 치소의 북성산(北城山) 남향의 언덕에 모신 것이다. 천장은 예종 즉위 후 논의에서 새로운 능 조성까지 7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영릉 천장은 세조의 유교(遺敎)로 볼 수 있다. 세조는 병상에 누운 뒤 아들 예종과 동생 밀성군을 자주 불렀다. 이 때 천장이 논의됐을 개연성이 높다. 서른아홉 살 장년인 밀성군은 세조의 이복동생이다. 세종의 18왕자 중 당시 생존자는 세조와 밀성군, 영해군 뿐이었다. 그나마 영해군은 투병중이었다. 승하 직전의 세조가 가슴에 감춘 고민, 왕실 흥망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유이(唯二)한 인물이 세자와 밀성군이었다.

   

 영릉 전경. 신록이 푸르른 여름날의 세종대왕릉 전경이다. @출처:문화재청

영릉 천장은 세조의 숙원이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의 가슴 속에는 아픔이 된 문구가  있었다. ‘곤수분자(坤水分觜),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다. 지관 최양선이 한 말이다. 최양선은 소헌왕후 능지가 헌릉 서쪽 자락으로 거론되자 큰아들이 죽는 비극의 자리라고 주장한다. 소름 돋는 발언을 한 그의 처벌을 청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아뢰었다. 전일에 대군 및 풍수학제조가 함께 수릉을 살폈습니다. 서운부정 최양선은 수릉의 혈 자리가 임방(壬方) 자리인 것을 감방(坎方) 자리라 했습니다. 또 ‘곤방 물이 새 입처럼 갈라졌다(坤水分觜)’며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絶嗣損長子)’는 허망한 말을 했습니다.” <세종 25년(1443) 2월 2일>


합장릉.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팔각장명등과 두개의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영릉 후보지에 대한 길지와 흉지 논란의 종지부는 세종이 찍었다. 세종은 부모 곁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입장이었다. 세종은 “복된 자리를 구한다 해도 선영(先塋)곁만 하겠는가. 화복(禍福)의 설(說)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나도 나중에 마땅히 같이 장사하되 무덤은 같이 하고 실(室)은 다르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세종은 승하 후 유교(遺敎)에 따라 헌릉 옆에 소헌왕후와 함께 합장됐다.

우연의 일치일까. 영릉이 조영된 뒤 최양선의 주장이 맞아떨어졌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39세로 승하하고, 문종의 장남인 단종이 17세에 사사되었다. 대통은 둘째 왕자인 세조가 이었다. 그런데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도 20세에 요절한다. 영릉 흉당을 굳게 믿은 세조는 부왕 능의 천장을 생각했다. 하지만 대신들이 반대했다. 명분은 최양선의 말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이었다.

비각. 능에서 내려다 본 비각이다. @출처:문화재청

이에 세조는 천천현의 땅을 돋워서 지세를 바꾸는 임시방편을 마련한다. 천천현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다. 왕릉의 풍수로는 종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해당됐다. 따라서 통행을 금지하려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세조 10년 3월 11일, 은퇴 후 충청도 서산에서 여생을 보내던 최양선이 상소를 했다. 천천고개(穿川嶺)를 두텁게 보토(補土)하고, 돌로 성(城)을 쌓아 길을 없애면 산천(山川) 음양(陰陽)의 길흉(吉凶)이 바뀔 수 있다는 안을 냈다.

세조는 폭넓은 풍수 학식으로 신하들에게 음양과 천지조화, 조상과의 관계를 설명한 뒤 “최양선은 망령된 사람으로 술법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 또한 고개를 막으려고 생각했다”고 보토와 축성을 지시했다.

무석인. 오랜 세월 동안 세종과 소헌왕후를 호위하고 있는 무석인은 온화한 인상에 장엄한 분위기가 풍긴다. @출처:문화재청

이후 몇 차례 영릉 천장 의사를 흘렸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들의 생각은 영릉 덕분에 세조가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영광을 얻었는데 옮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조는 13년(1467) 4월 5일에도 한명회 서거정 구치관 등에게 영릉의 개장(改葬)을 의논하게 한다. 신숙주에게는 경기의 산을 살피도록 했다. 지관인 안효례 최호원에게 영릉의 산형도(山形圖)를 보여주며 길흉을 물었다. 두 사람은 우물쭈물하고 길흉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임금은 이들을 하옥 후 파직시켰다. 임금의 마음을 읽지 못한 죄였다.

세조 14년(1468)에 임금은 다시 영릉 천장을 추진했다. 그러나 서거정이 반대했다. 천장은 복을 얻으려는 행위인데, 왕이 된 것보다 더한 복은 없다는 주장이었다. 강한 반대에 직면한 세조는 “경의 말이 옳다. 내가 다시 능을 옮길 뜻을 두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영릉이 헌릉 경내 대모산에 있는 한 큰아들의 죽음과 절손의 아픔이 계속될 수 있음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문석인. 영릉 문석인 의복에는 곡선미가 유려하다. @출처:문화재청

이에 죽음의 사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던 순간에 가장 믿을 수 혈육인 세자와 밀성군에게 고명(顧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릉 천장을 해 예종의 종손이 안정되게 나라를 운영하게 하려는 마지막 정치다.

이는 천장을 반대하는 대신들과 상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세조 때의 대신들은 영릉 덕분에 권세를 유지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관들의 표현처럼 큰아들이 꺾이는 지세이기에 세조가 정권을 쥐었고, 신하들인 백관들도 복록을 얻고 있다. 만약 문종이 승하하지 않았다면 세조 때의 권신 중 상당수는 복록을 누리지 못할 게 뻔했다.

이를 아는 세조가 비밀로 해야 할 천장 고민을 나눌 대상은 극히 한정돼 있었다. 세조는 평소에 밀성군에게 “나와 아우는 40년을 우애롭게 지냈구나”라는 표현을 했다. 그런 영향으로 세자인 예종은 밀성군을 숙부로 불렀다. 예종은 즉위년 11월 12일 공신 교서를 발표했다. 이 때 종친인 덕원군 이서는 경으로 한 반면에 밀성군 이침은 숙부로 표기했다.


세종대왕자 태실. 세종대왕의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다. @ 이상주

예종은 즉위 후 첫 국가 조영사업으로 영릉 천장을 선언했다. 밀성군은 영릉 천장 총책임자인 도제조로서 전체 그림을 그렸다. 이는 세조와 밀성군, 세자의 비밀 대화를 시사한다. 부왕인 세조 못지않게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예종의 전격적인 천장 발표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세조 때 천장에 반대했던 훈구대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임금의 고명을 내세우는 밀성군의 설득에 훈구대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또 하나는 세조의 종친 우대책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대신이 예종 시대에 정권 창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적극 참여했을 가능성이다.

천장 반대에 강한 목소리를 내던 서거정은 밀성군의 부관으로 참여한다. 실제로 훈구대신은 세조가 왕족세력으로 정부에 들인 귀성군 이준과 태종의 외손 남이를 제거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세조의 숙원으로 새로 조영된 영릉은 후세인들에 의해 명당으로 인정된다. 광해군 때 학자인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비기(秘記)를 전했다.

‘여주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영릉(英陵)이다.’

 이상주

왕실 전문 역사작가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사직 왕릉 제향 전수자다. 주요 저서로는 태조와 건원릉(문화재청), 태종과 헌릉(문화재청), 조선의 혼, 백강에 흐르다(부여군), 세종대왕 자녀교육법(다음생각), 세종의 공부(다음생각),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다음생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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