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청년칼럼=석혜탁]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이어 김민섭 작가가 선보였던 책 <대리사회>.

캠퍼스에서 논문에 파묻혀 지내던 그가 직접 대리운전을 하며 느끼고 겪은 이야기를 담았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김민섭, 《대리사회》 中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 슬픈 은유다.

어쩌면 더 문제는 이 살풍경한 대리사회에서 ‘주체라는 환상’에 미혹되는 것일 게다.

Ⓒ석혜탁 촬영

김민섭은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을의 공간’은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위축시킨다”고 말한다.

‘을’이 할 수 있는 것은 대답뿐이다.

그 대답의 범위 역시 제한적이다. ‘갑’의 심사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치, 종교 얘기에서 반론을 펼칠 권리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주체와 피주체의 대화는 주체와 주체의 대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듣고 말하는 행위 외의 중간 과정은 모두 생략되는 일방적 특질을 갖는다.

‘을’은 즉, ‘피주체’는 감히 대화를 이끌고 간다는 생각조차 해선 안 된다. 이런 대화에서 사유와 진정성은 휘발되기 마련이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 김민섭, 《대리사회》 中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을들의 전쟁. 혹은 ‘을A’의 ‘을B’에 대한 폭력.

이는 곧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말한 수평폭력이 아니던가.

늘 많이 보게 되는 풍경이다. 씁쓸하다.

‘갑’은 이런 메커니즘을 냉철히 인식하고, 을들 간의 쟁투를 이용해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나선다. 이 역시 항시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다시 김민섭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계가 아니다. 나는 ‘지문’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사람이 있다.”

- 김민섭, 《대리사회》 中

사회문화평론가로서 김민섭 작가가 보여주는 어떤 일관된 태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

지문이 있는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지점을 이번에도 김민섭이 호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 누구도 기계가 아니다.”

 석혜탁

-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저자. 
-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가끔씩 라디오에도 나간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