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의 재계 인사이트]

[논객칼럼=권오용]

맥주를 만들어 팔던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그룹이 중공업 위주로 사업재편이 한창이던 2000년 초, 당시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본부장이던 박용만 사장(현 대한상의 회장)이 전경련 출입기자단과 세미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 사장은 “나한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다”라는 기업 구조조정 사(史)에 남을 명언을 던졌다. 쉽게 말하면 남이 탐내는 물건을 내 놓아야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두산이 돈이 되는 맥주사업을 접고 그룹의 발상지였던 영등포 공장을 매각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세미나에 참석했던 경제부 기자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도 했다. 그 후 두산그룹은 구조조정의 성공 모델로 꼽히며 승승장구했다. 두산 중공업과 두산 인프라코어를 앞세운 중후장대형 기업으로 과감히 탈바꿈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탈원전을 앞세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의 변화는 두산에 큰 시련이 됐다. 원전산업이 붕괴되면서 경영사정이 급격히 악화됐고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당기순손실 4925억원을 기록했다. 결국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채권단이 개입해 3조 6000억원을 지원받는 구조조정 안에 합의하고 급한 불을 꺼야만 했다. 오너 일가(패미리)의 고통분담도 지원의 명분으로 부각됐다. 이 과정에서 예의 '걸레론'이 떠오른 것은 두산솔루스의 매각이 보도되면서 부터였다. 돈 되는 것부터 매각한다는 원칙에 부합됐다. 두산솔루스는 지난해 매출 2633억원, 영업이익 382억원을 올릴 정도로 안정적인 회사다. 던진 카드로는 역시 구조조정의 달인, 두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두산솔루스 홈피

그런데 두산솔루스는 ㈜두산(17%)과 총수일가 특수관계인 36명(44%)이 총 61%의 지분을 갖고 있다. 또 두산그룹의 미래로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관심도가 높은 기술 사업들이 모여 있다. 두산의 미래에 특수관계인 36명이 44%? 두산솔루스의 매각이 이뤄지면 특수관계인들이 절반에 가까운 매각자금을 가져가는 구조다. 법인인 ㈜두산에는 3분의 1이 안 되는 금액이 꽂힌다. 이는 대기업의 신성장사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자 오너들이 종종 사법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룹의 자원과 역량을 한 곳에 몰아줘서 키운다. 대주주는 당연히 오너 및 특수관계인이다. 상장이나 매각을 통해 생긴 자금을 바탕으로 오너의 지배력을 키우는 구조다.

두산솔루스로 생기는 오너들의 이익이 크다면 두산중공업으로 발생되는 국민 경제적 손실도 크다. 이는 채권단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적 사항이다. 성공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매각자금은 다시 두산중공업으로 들어와야 한다. 두산그룹의 회생을 위해 꼭 필요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채권단은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반드시 챙겨야만 할 것이다.

탄탄하던 두산그룹이 왜 이렇게 취약하게 되었을까? 두산그룹 가계도를 보면 패미리멤버들이 많이 포진돼있다. 30대 상무부터 전무, 부사장, 부회장까지 경영에 참여한 4세만 9명이다. ㈜두산은 물론 두산건설,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오리콤 등 각 관계사에도 등재돼 있다. 혈연 위주의 지배구조가 혹 위기의 단초가 되지는 않았을까?

두산그룹 앞날이 흐린 날씨 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전경@오피니언타임스

2013년 두산건설이 '일산 두산위브' 미분양 사태 등으로 위기에 빠지자 두산중공업은 지금까지 유상증자, 현물출자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1조 7000억원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두산건설은 지난해 12월 결국 상장 폐지되고 손해의 뒷감당은 오롯이 두산중공업에게 넘겨졌다. 결과적으로 현재 두산이 처한 위기의 단초는 다년간 손해가 누적된 건설부문의 정리 시점을 놓친 것이었다. 칼과 같은 구조조정을 해 왔던 두산그룹이 스스로의 원칙을 무너뜨린 것은 4대에 걸쳐 누적된 형제들의 과잉 경영참여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장의 논리로 접근해야 할 구조조정을 핏줄의 논리로 뒷받침하려니 형평의 논리가 나오고 의사결정이 더뎌진 것은 아닐까?

몇년 째 예견된 경영실적의 악화에도 두산의 경영진들이 받아간 고액의 연봉과 배당도 지금 보면 이해할 수 없다. 부실한 계열사인 두산건설에는 우량 계열사 두산 중공업의 회사자금을 투입해 지원하면서 그룹의 역량을 모은 신사업에는 특수관계인들이 36명이나 개인적으로 돈을 지른 것도 어떻게 보면 '도덕적 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형제간 과잉참여에서 초래된 그룹의 위기를 탈원전에서 이유를 찾아 사회와 소통한 것이 정부지원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탈원전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두산건설에 대한 대주주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은 두산그룹의 대주주, 즉 패미리와 특수관계인들이 해줘야 한다.

지난 4월 미국 정부는 항공 산업에 코로나-19 긴급 구제금융 250억달러를 지원하면서 일정한 조건 아래 고용 총량유지, 임원 고액보수 제한, 기업 정상화 이후 이익의 국가, 사회 공유 등을 제시했고 업계와 합의했다. 20년전 두산의 경영진들은 알짜 사업을 팔아 미래의 캐시카우를 확보했다. 지금 두산에 필요한 것은 '걸레론'이 던져 준 결기와 굳은 의지의 재확인이다. 방만하고 분산된 의사결정체제를 집중하고 단일화시켜 신속하고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 무늬만 오너인 곁가지 패미리들을 과감히 퇴진시키는 것은 그룹 회생의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해 줄 수 있다. 그룹이 살면 그 이익은 국가와 사회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4대에까지 이른 두산의 오너 경영이 10대, 20대까지도 이어지는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권오용

전 SK 사장

(재)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CCO클럽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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